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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챌린저’ 참사 30년, 그들이 남긴 것들

입력
2016.04.09 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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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로저 보졸리와 로버트 이블링

챌린저호의 고체로켓추진체 제작 엔지니어 로저 보졸리. 사고 후 그는 자신의 진실과 기술자의 윤리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용기 있게 나섰다. AP기자가 찍은 91년 사진.

미국 우주왕복선 ‘챌린저’ 참사 30주년이다. 언론이 사고 당일(1월 28일, 1986년)을 전후해 거의 매년 저 일을 고통스럽게 환기해온 까닭은, 우주 탐사 역사상 최악의 저 참사가 인재(人災)였음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사고는 추진체 부품 결함, 엄밀히 말하면 결합부 고무 패킹(O-Ring)의 저온 손상 때문에 빚어졌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그릇된 의사결정구조와 추진체 제작업체 모턴 사이어콜(Morton Thiokol)사의 안일한 판단이 원인이었다. 그들은 기술진의 사전 경고와 발사 연기 주장을 묵살했다.

대통령직속사고조사위원회(일명 로저 위원회)의 첫 조사보고서가 나온 건 그 해 6월이었지만, NASA의 우주왕복선 프로젝트는 사고 후 근 3년간 전면 중단됐다. 사이어콜은 존폐 위기에, 직원들은 실직 위기에 몰렸다. 유타 주 브리검 시 사이어콜 공장 주변은 “살인자들(Morton Thiokol Murderers)”이라는 낙서로 뒤덮여 있었다. 사고에 연루된 이들, 그릇된 결정의 책임을 져야 했던 이들은 대부분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그들 중 로저 보졸리(Roger Boisjoly, 1938~2012)와 로버트 이블링(Robert Ebeling, 1926~2016)이 있었다. 둘은 사이어콜의 챌린저 ‘고체(연료)로켓추진체(SRB)’ 제작 프로젝트 담당 기술자였다. 그들은 가장 먼저 참사를 예견했고 발사를 막으려 했지만 결정권자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당일, 우주선 폭발 장면을 속절없이 지켜봐야 했다. 무사하리라 믿었던 이들과 달리, 그들은 뻔한 참사를 막지 못했다는 더 큰 죄책감과 분노에 함께 통곡했다고 한다.

1986년 1월 28일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73초만에 폭발했고, 승무원 전원이 희생됐다. 미국과 세계가 그 사고를 고통스럽게, 끊임없이, 환기하는 까닭은 다시 같은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다. 희생자를 추모하는 데서 나아가, 진실을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다. 자료사진.

참사 후 그들은 기술자적 양심과 (자신들과 동료들의) 직장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 사이에서, 또 살인자가 아니라는 자기존재증명 욕구의 틈바구니에서 고통 받았다. 자신들이 면책 받는 길은 직장과 최대 고객인 NASA를 배신하는 거였고, 무엇보다 동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거였다. 직장 동료를 포함해 브리검 시 주민 대다수는 몰몬교도였고, 주말에도 교회에서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 이들이었다. 참사 3주 뒤 npr이 특종 보도한 참사 속보(“사전 경고가 있었다”)에는 그들(둘 외에 부서 책임자 앨런 맥도널드와 동료 기술자 에이널드 톰슨, 브라이언 러셀)의 증언이 익명으로 실려 있었다.(npr, 2006.1.28) 직장에 계속 남은 이들과 달리 둘은 심리적 중압감으로 장기 병가를 냈다. 그건 사실상 자의반 타의반의 퇴사였다. 당시 보졸리는 48세, 이블링은 60세였다.

하지만 이후 둘의 행로는 대조적이었다. 실명으로 진실을 처음 공개하고 로저위원회에서 증언한 보졸리는 동료들과 지역 여론의 뭇매에 분노하며 한동안 스스로(와 가족)를 괴롭혔다. 88년 마음을 추스른 그는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300여 차례 국내외 대학과 연구소 강연으로 ‘기술자의 윤리와 책임’을 전도했다.

내내 자신을 감추며 살았던 이블링은 분노를 내면화해 자책으로 스스로를 고문했고, 89년 무렵부터 지역 철새 보호 등 환경활동가로 여생을 보냈다. 그가 자신을 드러내며 그간 겪은 갈등과 죄의식을 토로하고 NASA와 사이어콜의 사과를 요구한 건 숨지기 직전인 지난 1월이었다.

보졸리는 1938년 4월 25일 매사추세츠 로웰에서 태어났다. 매사추세츠대학서 기계공학을 전공한 뒤 선택한 첫 직장은 록웰사 항공기 설계팀이었다. 74년 터키 국적DC-10 여객기 추락 참사(346명 사망)의 트라우마가 그에겐 있었다. 사고 원인 중 하나가 동체 도어 디자인결함이었고, 담당 부서의 일원이었던 그는 그 책임으로부터 스스로를 풀어놓지 못했다. 80년 1월, 캘리포니아 남부의 집과 연봉 절반을 포기하고 사이어콜사로 이직한 것은 더 깊이 신앙생활을 하며 가족과 조용히 살고 싶어서였다고 87년 인터뷰에서 말했다.(LA타임스, 1987.1.28) 그는 챌린저 SRB의 설계ㆍ제작팀 수석(Chief)엔지니어로 배치됐다.

이블링은 1962년 사이어콜에 합류했다. 1926년 9월 4일 시카고에서 자동차 정비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캘리포니아 폴리테크 주립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NASA 머큐리계획의 우주선 ‘아틀라스’를 제작한 샌디에이고 항공우주회사 ‘컨베어(Convair)’에서 일을 시작했다. 사이어콜 사가 NASA 우주왕복선 SRB 프로젝트를 맡은 건 74년이었고, 그는 챌린저 SRB의 점화 및 최종조립 담당 매니저였다.

우주선에 이륙 추진력을 공급하는 SRB는 연료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주로 다단계로 제작돼 연소한 탱크들을 순차적으로 분리하며 상승한다. 고체연료는 점화열로 기화해 연소하는데, 기화한 연료가 결합부에서 새지 않도록 막아주는 내열 합성 고무 패킹이 ‘오링(O-Ring)’이다. 사이이콜 기술진은 85년 1월 24일 회수된 SRB 오링이 손상된 사실을 발견, 섭씨 11.7도 이하에서는 탄성을 잃고 경화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들은 챌린저 SRB 제작 일정을 진행하는 한편, 오링 소재 교체와 설계 변경 등 별도의 개선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경영진과 NASA에 건의했다.

하지만 ‘선샤인벨트’ 플로리다의 1월 평균 기온이 16~23도다. 오링 개선 프로젝트에는 적잖은 예산과 시간, 또 NASA와의 까다로운 협의와 서류작업이 필요했다. “샌디에이고 창고에서 하룻밤이면 실어올 수 있는 2,500달러 짜리 발전기 한 대를 구하느라 (NASA와) 협의하는 데 4주가 걸렸”던 적도 있었다고 LA타임스는 전했다. 사이어콜 경영진으로서는 계약 기일 안에 계약된 그대로 SRB를 납품하는 일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기술진의 요구는 번번히 묵살됐다. 보졸리는 85년 6월, 데이터에 근거한 우려와 건의를 개인적으로 문서화해 회사와 NASA에 전달했고, 사본을 따로 보관했다.

챌린저 발사 당일 플로리다의 예보 기온은 평년보다 16도 이상 낮은 영하 1.1도였다. 사이어콜 기술진은 플로리다 케네디 발사기지에 파견된 부서장 앨런에게 (이블링이) 전화를 걸어 발사 연기를 요구했고, 하루 전인 25일 밤 NASA 책임자들과 긴급 전화 회의를 가졌다. 회의에 참석한 이는 보졸리와 톰슨이었다. 보졸리는 85년의 파손된 오링 사진을 사이어콜 부회장단 테이블에 집어던지다시피 하며 항변했고, ‘유순한’ 톰슨조차 경영진 사이에 껴들어 실험 데이터가 적힌 노트 패드를 펼쳐 보이며 설명했다고 한다. “끔찍하다”(NASA SRB 감독관 조지 하디) “세상에, 그럼 언제 발사하란 말이냐? 4월에?”(NASA 프로그램 매니저 로렌스 멀로이)(npr, 2012.2.6)

발사 강행 결정은 그들이 퇴장한 뒤 NASA와 사이어콜 경영진에 의해 이뤄졌다. 이미 두 차례 발사가 연기된 터였고, 디데이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의회 연두교서(state of the union) 발표일이었다. 레이건은 연설에서 챌린저 발사 성공을 언급한 뒤 NASA를 격려 방문할 예정이었다. 물론 소련을 비롯한 전 세계가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챌린저는 이륙 73초 만에 폭발했고, 승무원 7명 전원이 숨졌다.

NASA 사고조사에 참가한 앨런과 보졸리는 모든 정황과 진실을 밝혔지만, 자체보고서에는 조립 하자 가능성 등이 장황하게 언급됐고, 오링 문제점은 몇 단락 삽입되는 데 그쳤다. 보졸리는 노골적인 원인 은폐 시도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85년 문서를 여러 부 복사해 숙소와 승용차, 브리검의 집 등에 분산해서 간직했다. 그의 진실이 로저위원회 일원이던 공군 소장 도널드 쿠티나(Donarl Kutyna)에 알려졌고, 대놓고 NASA를 공격할 수 없었던 쿠티나가 조사에 가담한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1918~1988)에게 귀띔해 원인을 자체적으로 밝히게 했다는 건 훗날 알려진 일이었다.

그들은 ‘내부고발자’로 몰려 NASA와 경영진, 직장 동료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주요 보직에서 배제됐고, 정보로부터 차단당했고, 당연히 승진 명단에서 누락됐다. 보졸리는 특히 더했다. 그의 아내 로버타(Roberta)는 npr 인터뷰에서 “회사가 잘못되면 내 아이를 당신 집 앞에 데려다 놓겠다고 말한 직장 동료도 있었다”고 전했다. 사이어콜은 의회의 경고를 받은 뒤에야 앨런을 비롯 관련자 인사 불이익을 시정했지만, 보졸리는 예외였다.

다들 정신적 외상 장애에 시달렸지만, 보졸리의 상황은 더 열악했다. 사고 후 폭식으로 몇 달 새 몸무게가 18kg이나 늘었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회사가 제공하는 스트레스장애 치료조차 거부했다. 아무에게나, 심지어 가족에게도 사소한 일로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고, “내가 알던 남편 같지 않았다”고 로버타는 87년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가 병원을 찾은 건 스트레스로 왼손 마비, 복시(複視)가 시작된 뒤였다.

그는, 적어도 겉으로는, 자책하지 않았다. 88년 그는 로저위원회 증언 직전 샐리 라이드가 자기를 포옹하며 격려해준 게 큰 힘이 됐다고 “(내 편은)그녀 단 한 사람 뿐이었다”고 말했다.(NYT, 2012.2.3) 샐리 라이드(Sally Ride, 1951~2012)는 NASA의 노골적인 여성차별에 맞서며 1983년 챌린저의 두 번째 비행에 승선한 미국인 첫 여성 우주비행사로, 쿠치나에게 오링 결함 가능성을 맨 먼저 전한 이였다.

보졸리는 1988년 미국과학진흥협회(AAAS)의 ‘과학 자유와 책임상(Prize for Scientific Freedom and Responsibility)’을 탔고, 그 이후 대학과 시민단체 등에 초청돼 기업 윤리와 데이터에 근거한 의사결정의 중요성 등에 대해 강연했다.(NYT, NPT 2012년 2월 부고) 그는 결장과 신장, 간에 암이 퍼졌다는 진단을 받은 지 2주 뒤인 2012년 1월 6일 별세(향년 73세)했다. 뉴욕타임스와 NPR등이 그의 작고 사실을 안 건 약 한 달이 지난 뒤였다. 로버타는 보졸리가 “청년들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삶”을 행복해했다고 npr 인터뷰에서 전했다.

사이어콜 SRB 엔지니어 로버트 이블링(오른쪽)은 자책하며 30년을 살다 숨지기 석 달 전에야 세상에 나섰고, 모든 이들을 대신해서 사과 책임자들에게서 사과를 받아냈다. Bear River Migratory Bird Refuge 홈페이지.

정년이 임박했던 이블링도 86년 직장을 떠났다. “그들(회사)은 나를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식으로 대했”고, “나도 누군가의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어떤 책임도 지고 싶지 않았다”고 그는 말했다.(LA타임스, 위 기사) 자책과 우울증에 시달리던 그는 89년 이후 숨을 거둘 때까지 유타주 철새보호 시민단체 ‘베어 리버 철새들의 피난처(Bear River Migratory Bird Refuge)’의 자원봉사자로 살았다. 80년대 중반 솔트레이크 범람으로 무너진 제방을 복구하고 수로와 데크와 탐조루트를 다시 손보고 수초를 가꾼 건 전적으로 그를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의 기부와 모금과 노동 덕이었다고 단체는 밝혔다. 공학 기술자 이블링은 특히 관개시설ㆍ수로 보강 등 기술적인 분야를 진두 지휘했고, 90년 ‘테오도르 루즈벨트 환경보존상’과 2012년 국립야생보존위원회(NWRA)의 ‘올해의 자원봉사자상’을 탔다.(fws.gov, 2016.3.24)

이블링이 세상에 나선 건 지난 1월이었다. 30년 전 익명으로 npr과 인터뷰했던 그는 다시 npr 기자를 브리검 집에서 만나 “이제 진실을 알릴 때”라며 “당시 NASA의 발사 결심은 확고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난 세월 혼자 감당해야 했던 자책과 죄의식을 울먹이며 토로했다. “나는 좀 더 노력할 수 있었고, 좀 더 노력했어야 했다.” “신은 그 일을 내게 맡기지 않았어야 했다. 나중에 신을 만나면 따져 물을 거다. ‘왜 나였냐?’고, ‘당신은 패배자(loser)를 선택했다’고.”

그의 인터뷰가 1월 28일 미국 전역에 방영되자 시민들의 격려 편지가 쇄도했다. 전 보스 앨런 맥도널드도 그에게 전화해서, “알면서 아무 것도 안 하거나 어찌되든 신경도 안 쓰는 게 루저”라고, “당신은 위너(Winner)”라고 말했다. “만일 당신이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멈추려는 시도조차 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음을 풀지 못했다. 그들은 사이어콜이 아니고 NASA가 아니라는 거였다. 사이어콜 부회장이던 로버트 룬트(Robert Lund)와 NASA의 조지 하디가 편지를 쓴 건 그 직후였다. 하디는 “당신과 동료들은 당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다.” NASA도 언론담당관 스테파니 쉬어홀츠 명의의 성명에서 “우주비행사들이 보다 안전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용기 있게 발언해준 이블링 같은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npr, 2016.2.25)

그제야 이블링은 마음이 좀 편해졌다고, “모든 건 끝을 맺어야 하는 법”이라고 말했다고 npr은 전했다. 말한 적 없지만, 그에게는 보졸리에 대한 부채감도 있었을지 모른다. 모두를 대신해 그 빚을 다 갚고, 그는 3월 21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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