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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를 바꿔가는 건 정부가 아니라 시민이었다

입력
2016.03.2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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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경제산업성 청사 앞에 설치된 반핵 천막농성장.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 반원전 활동가들이 이 곳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벌써 4년 반이 넘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도쿄 경제산업성 청사 앞에 설치된 반핵 천막농성장. 후쿠시마 사고 이후 일본 반원전 활동가들이 이 곳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벌써 4년 반이 넘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오늘도 하루 지났으니 2만 1,000엔이 추가됐네요. 나라에 내야 할 돈이 3,000만엔이 넘었는데, 낼 생각이 없어요. 아니 그런 돈이 없어요. 정부가 사고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저희에게 국가 소유 공터를 사용한 대가를 내랍니다. 그것도 배려해서 60%로 깎아줬다더군요.”

후쿠시마 사고 5주기를 맞은 지난 11일 오후. 도쿄 경제산업성 앞에 천막을 치고 1,644일째 반(反)원전 농성을 벌여 온 후치가미 타로(77) 농성장 대표는 나이를 잊은 듯했다.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시민이 40~60명, 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1,000명 가량의 시민들이 천막을 중심으로 모인다. 이날도 낮부터 응원 방문이 이어졌고, 반원전 활동가들의 연설을 곁들인 집회가 열렸다. 하지만 농성장 풍경치고는 독특했다. 천막 세 채 가운데 한 채는 예술가들과의 협업으로 ‘반원전 미술관’으로 꾸몄다. 농성장 입구도 강렬한 구호보다는 반감이 덜한 상징적 그림과 귀여운 일러스트가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탈원전 운동의 상징이 된 이 농성 천막은 언제라도 철거될 수 있는 처지다. 일본 정부가 후치가미 대표를 비롯한 탈원전 활동가 2명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 2월 법원은 천막 철거 가집행을 허용했다. 재판부는 또 활동가들에게 그간의 토지사용료(1,140만엔)와 함께 철거할 때까지 매일 2만 1,000엔을 추가로 낼 것을 명령했다. 이 소송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후치가미 대표는 “라면가게를 하거나 주먹밥을 판다면 대가를 내는 것이 당연하지만 우리는 정부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기 위해 이곳을 점거한 것”이라며 “정부는 손해배상을 요구하기 전에 자신들의 책임부터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사고는 수많은 상처를 남겼고, 그 아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하지만 사고를 계기로 일본 시민사회는 조금씩 깨어나고 있다. 정부가 역사에서 배우지 못한 채 무리하게 원전 재가동을 추진하는 사이, 시민들은 현명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행동에 나서고 있다.

문제를 감지하자 배우기 시작했다

열혈투사가 된 후치가미 대표이지만, 사실 후쿠시마 사고 전만 해도 원전 관련 지식이나 의견은 전무했다. “큰 충격이었어요. 상식적으로 불이 나면 끌 수 있거나, 연료가 다해 저절로 꺼져야 하는데, 원전은 달랐죠. 아직도 후쿠시마 1~3호기는 접근조차 어렵잖아요.” 참사 이후 그는 원자력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반원전 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일본에는 54기의 원자로가 돌아가고 있었지만 대부분 시민들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전력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만큼 무관심했다. 후쿠시마 사고는 이런 일본 시민들에게 원전의 잠재적 위험성을 일깨웠다. 불행 중 다행일까. 전례가 없어 모든 것을 스스로 체득해야 했던 체르노빌과 달리, 후쿠시마는 모든 것을 체르노빌에서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시민들이 직접 나서 배우고 조직화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주목할 만했다. 3ㆍ11 피해자를 돕는 시민단체 ‘글로벌미션재팬’ 관계자들은 직접 체르노빌로 날아가 영구 피난민들과 관계기관을 방문했다. 오노 이즈미 부대표는 “체르노빌 피난민과 만나면서 무엇보다 정신적 피해 지원이 필수적이며, 커뮤니티를 회복시키기 위한 친목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도입했다”고 했다. 도쿄 고토구에 마련된 피난소에는 체르노빌 피해자 지원기관 관계자가 초창기에 직접 방문, 그간의 활동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시민들

2012년 10월 후쿠시마대학 교수들과 지역 농민, 소비자 협동조합 등이 모여 ‘토양 검사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후쿠시마 농산물에 대한 우려와 기피로 현지 농민들의 고통이 날로 더해지는데도 정부는 물론 어디서도 후쿠시마 농지에 대한 정확한 방사능 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지역 학계와 시민사회가 직접 나서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먼저 체르노빌 답사를 떠났다. 이후 벨라루스에서 만든 ‘로켓’이라는 특수 방사능 측정기를 들여와 총 2만 8,000여곳의 논과 1만여곳의 과수원을 대상으로 방사능 오염 정도를 파악했다. 한 곳 당 세 지점을 조사했으며, 2년 반에 걸쳐 조사ㆍ분석한 자료를 지도로 만들어 지역 농민과 공유했다.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히라이 유타씨는 “정부가 제공하는 시버트 수치는 공기 중 방사선량으로 이는 바람 방향에 따라 쉽게 변하기 때문에 농부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우리는 민간 후원을 받아 땅의 실제적인 오염을 나타내는 베크렐, 즉 방사능 정도를 측정했다”고 설명했다. 그 결과 정부의 규제치인 100 베크렐 이하부터 많게는 2만 베크렐까지 관측됐다. 그는 “불과 몇 미터 옆에서도 다른 수치가 나올 정도로 무작위에 가까워 사실 어느 지역이 안전하고 위험한지 단정할 수 없다. 비효율적 제염에 쏟아 붓는 비용의 일부만 있어도 철저한 검사가 가능한데도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정부가 제대로 된 방사능 정보를 제공하지 않자 후쿠시마대학 교수와 시민단체, 농민들이 스스로 토양오염도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이 프로젝트를 맡았던 히라이 유타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일본 정부의 무책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일본정부가 제대로 된 방사능 정보를 제공하지 않자 후쿠시마대학 교수와 시민단체, 농민들이 스스로 토양오염도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다. 이 프로젝트를 맡았던 히라이 유타씨가 심각한 표정으로 일본 정부의 무책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히라이씨는 또 후쿠시마 음식을 먹자는 정부의 캠페인이 계속될수록, 오히려 후쿠시마 농민들의 시름은 깊어간다고 지적했다. “왜 안전한지는 설명하지 않고 무작정 안전하다고 하는데 누가 먹겠습니까. 오히려 불신이 커지게 되죠. 실제로 농민들은 방사능을 규제치에 한참 못 미치는 5베크렐 이하로까지 떨어뜨리려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데, 정부 때문에 오히려 농민과 소비자 사이가 멀어지고 있어요.”

그렇다고 해서 후쿠시마 식품이 안전하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는 “제염이 거의 진행되지 않은 산이나 숲에서 채취된 버섯류 등은 안심하기 어렵다. 바다로 방류되는 오염수 때문에 수산물도 안전하지 않은데 세슘 외 스트론튬 등은 일반적 장비로 측정이 안돼 나조차도 섭취를 꺼리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어 “정부는 툭하면 후쿠시마에 대해 ‘후효히가이’(정확하지 않은 정보나 루머로 피해를 입는 것)라고 하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다. 현지 주민들의 피해는 사실이기 때문에 ‘지츠가이’(실질적 손해)라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쿠시마현 내 유기농 식료품점 에스페리(스페인어로 ‘희망을 갖는다’는 뜻)에 진열된 현지 농산물들. 이들은 제품의 생산 과정을 모두 공개함으로써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후쿠시마현 내 유기농 식료품점 에스페리(스페인어로 ‘희망을 갖는다’는 뜻)에 진열된 현지 농산물들. 이들은 제품의 생산 과정을 모두 공개함으로써 소비자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피에르 엠마뉴엘 델레트헤 프리랜서기자 pe.deletree@gmail.com

후쿠시마 어머니들의 모임인 ‘타라치네’는 후쿠시마 내 토양과 물, 이끼 등의 방사능 오염 정도를 주기적으로 모니터링 해 그 결과를 매달 홈페이지에 공개하는 한편 회원들이 각지에서 보내오는 식품을 검사해준다. 노자키 아유미 활동가는 “정부는 원전에서 60㎞ 떨어진 후쿠시마시는 안전하다고 하지만 우리 조사로 어떤 곳은 원전 옆 마을인 후타바보다 높은 수치가 관측됐다”며 “정부의 정확한 정보 공유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단체는 또 전신방사선측정기와 갑상선초음파기기 등을 구비해놓고 1,000엔만 내면 누구나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엄마와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지금은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방문이 늘어나는 추세다. 정부가 시민을 지키는 데 실패하자 시민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나선 것이다.

법도 달라지고 있다

원전 관련 소송도 크게 늘어났다. 일차적으론 후쿠시마 사고 이후 피해자들이 도쿄전력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이 대부분이지만, 점차 다양한 유형의 원전소송이 후쿠시마를 넘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예컨대 원전이 있는 다른 지역에선 ‘재가동 반대 소송’이 줄을 잇고 있는데, 주목할 것은 원전 문제를 보는 법원의 시각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탈원전변호단전국연락회 사무국의 수게나미 타모츠씨는 “원전건설 반대 같은 소송은 1970년대부터 있었지만 과거 재판부는 고등과학적 분야라는 이유로 직접 판단이 어렵다면서 각 분야 전문가가 참여했으니 원전은 안전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었다”면서 “그러다 보니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고 말했다. 연락회는 3ㆍ11 이후 젊은 변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단체로, 현재 전국적으로 300여명의 변호사들이 참여해 20건 이상의 반원전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큐슈에서는 노후한 겐카이 원전 폐지를 위해 무려 1만 명이 모였는데, 원전 250㎞ 이내에 사는 시민 1만 명은 인지대 1만엔을 스스로 부담하면서 소송에 참여했다.

2014년 5월 후쿠이 지방법원이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오이 원전 재가동을 금지시켜달라는 시민들의 손을 들어준 건 법원의 변화를 보여준 상징적 판결이었다. 또 지난 9일에는 시가현 주민들의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면서 이미 재가동이 시작된 다카하마 원전이 가동을 멈추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다. 수게나미씨는 “더딘 싸움이기는 하지만 일본 사법체계에서도 원전을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재판관이 생겨났다는 사실이 놀랍고 반갑다”며 “이제 우리는 세 번째 승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사고 5년이 지나면서 일본 사회에선 다시 원전에 익숙해지는 모습이 엿보인다. 한때 80%에 이르렀던 원전 반대 여론은 최근 60%대로 줄었다. 하지만 이들은 안전과 신뢰를 위한 싸움을 중단할 수 없다고 했다. 토양검사 프로젝트 책임자였던 히라이씨는 “죄 없이 희생된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우리는 후쿠시마에서 계속 배워야 합니다.”

도쿄ㆍ후쿠시마=김혜경 프리랜서기자 salutkyeong@gmail.com

다무라 히사노리 프리랜서기자 hisanori.ymr@hotmail.f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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