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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무늬만 약자대표

입력
2016.02.1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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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대 공산’의 체제경쟁에서 자본주의가 완승을 거둔 지도 어느덧 한 세대. 풍요로운 삶을 향한 인류의 갈망, 이제 자본주의 없이는 달성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자본주의의 층고(層高)가 높아질수록 그 그늘도 길고 커진다. 정글의 법칙이 작동하는 자본주의에서 청년, 노인, 여성, 장애인 등 약자들의 삶이 고단한 것은 자연계의 법칙을 닮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강자와 약자가 공생(共生)하는 인간적인 자본주의로의 착한 수정을 거듭하는 이유다.

자본주의의 탁류 속, 복지국가로의 전환 동력은 민주주의가 촉발한다. 정치가 시장을 이기는 과정에 관한 대표이론으로 권력자원론과 선거경쟁론이 있다. 권력자원론에 의하면 자본주의 초기의 정치적 권력은 경제적 자원을 소유한 자본가들이 독식한다. 하지만 자본가의 수는 노동자 혹은 서민의 수보다 늘 적다. 수의 정치가 중요한 게 민주주의인데 말이다. 간헐적으로 찾아오는 선거의 계절마다 경제적 약자들이 강자들을 누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선거경쟁론도 비슷한 설명을 내놓는다. 당선에 목맨 정치인들은 다수 유권자들의 표심에 발 빠르게 반응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다양한 복지제도가 발전했다는 게 이 이론분파의 관찰결과다.

복지가 착착 늘고 있는 지금도 한국 사회 취약계층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노동자들의 복지가 늘어도 비정규직보다는 정규직의 복지가 먼저 늘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보다는 중산층을 위한 현금과 서비스가 더 쉽게 발달하는 게 한국의 복지정치다. 민주주의가 자본주의를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 복지정치론이 틀린 걸까? 아니다. 두 이론이 공히 지적하는 필요조건이 빠져있는 게 한국의 현실인데, 바로 ‘약자 대표성의 결여’가 문제다.

다른 선진국들처럼 한국도 대의 민주주의를 표방한다. 선출된 대표를 통해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중요한 게 ‘약자 대표성’의 확보 여부다. 진정으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대표가 선출되어야 약자를 위한 정치가 시작된단 얘기다. 우리 정치판에서도 여성, 청년, 장애인 대표를 국회로 보내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번에도 약자대표에 공천 가점을 주자는 움직임이 모든 정당에서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약자대표들이 국회에서 보여준 성과는 초라하기 그지없고, 지금 드러나고 있는 약자대표들의 면면을 보면 코미디가 따로 없다.

‘얼짱’으로 소문난 청년대표는 청년고용과 노동개혁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취준생’이라는 또 다른 청년대표는 고교선배인 재벌들 후원으로 선거를 치르겠단다. 중진 여성의원이 예비 여성대표들을 모아놓고는 ‘여자는 모자란 듯 보여야 한다’고 조언하는가 하면, ‘원로’들이 다수를 점한 국회가 노인빈곤만은 모른 척하는 게 우리네 복지정치다. 무늬만 청년, 무늬만 여성, 무늬만 노인들이 국민의 대표가 되면서 벌어지는 한편의 촌극이다.

제대로 된 약자대표는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첫 번째 조건은 ‘전문성’이다. 약자들의 고단한 삶을 꿰고 있으며 어떻게 해야 개선할 수 있을지를 알고 있어야 제대로 된 약자대표다. 두 번째 조건은 ‘공공성’이다. 자신의 출세가 아닌, 약자들을 위한 이익의 대변에 목숨 건 정치인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전문성과 공공성으로 무장한 염치 있는 인격의 소유자를 가려내는 눈이 있어야 약자를 위한 정치가 완성될 것이다.

버니 샌더스가 미국식(式) 청년정치의 우상으로 떠오르는 요즘, 약자대표의 정치학을 다시 써야 할 시점이다. 1941년생 노인인 그가 젊디젊지만 전문성과 공공성이 떨어져 보이는 우리네 청년후보들에 비해 훨씬 더 ‘청년스러워’ 보이는 까닭이다. 노예해방의 영웅 에이브러햄 링컨도 백인이지 흑인이 아닌 걸 보면 인구학적 배경보다 중요한 게 전문성과 공공성이다. 진정한 약자대표로 20대 국회를 채울 수 있어야 자본주의의 유효기간이 조금이라도 늘어날 것이다.

안상훈 서울대 교수ㆍ사회정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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