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 이세돌 9단의 3월 바둑 대결에서 과연 누가 이길 것인가 못지 않게 눈길 가는 이야기가 있다. 인공지능 바둑 강자의 등장이 주로 한중일을 주무대로 오랜 역사를 가진 바둑계에 어떤 새 바람을 몰고 올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당장 이번 승부는 아니더라도 언젠가 이세돌 같은 인간 고수가 질 가능성은 충분하다. 체스 세계 랭킹 1위였던 러시아의 카스파로프가 IBM 딥블루에게 진 뒤 체스계가 밟아온 궤적이 바둑계의 앞날을 내다보는데 도움이 될 듯 하다.

알려진대로 카스파로프는 1996년에 IBM이 개발한 체스 전용 컴퓨터 딥블루와 첫 대결을 벌였다. 한 차례 승부를 내주긴 했지만 카스파로프는 전체 6번 승부에서 3승 1패 2무로 승리했다. 하지만 다음 해 더 성능이 향상된 딥블루와 재대결에서는 2승 1무 2패로 딥블루의 승리였다. 자사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려는 마케팅 차원의 개발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이후 IBM은 딥블루를 해체했다.

하지만 인간과 컴퓨터의 체스 대결이 그것으로 끝난 건 아니었다. 2002년에는 세계 랭킹 2위인 블라디미르 크람니크와 컴퓨터 소프트웨어 딥 프리츠가 대결해 무승부, 이듬해 카스파로프와 또다른 프로그램인 딥 주니어가 맞붙어 역시 무승부, 그 해 카스파로프와 X3D프리츠의 대결에서도 무승부였다. 2006년에 딥 프리츠는 크람니크와 재대결을 벌여 이번에는 2승 4무로 승리했다.

단독 승부가 아니라 인간끼리, 컴퓨터끼리 조를 짜서 단체전도 벌였다. 최초의 단체전은 2005년에 세계 랭킹 19위, 35위, 50위 3명과 컴퓨터 히드라, 프리츠, 주니어 3종이 편을 갈라 맞붙어 8대 4로 컴퓨터가 이겼다. 수년 전에는 스마트폰 탑재 체스 프로그램과 체스 고수와 대결도 스마트폰이 승리했다. 비록 카스파로프 이후 이름난 체스 고수들이 컴퓨터와 대결에서 참패하지 않았다고는 해도, 주요 업체들이 최고 성능의 체스 컴퓨터 개발에 그다지 의욕을 보이지 않는 상황까지 감안한다면 체스계에서는 컴퓨터의 우위가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만큼 확고해진 분위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굴욕적이게도 인간이 하수 취급을 받는 일도 가끔 벌어진다. 컴퓨터가 말을 줄여 한 수 접어주고 경기를 벌이는 것이다. 2007년에 에스토니아 출신의 체스 그랜드마스터 얀 엘베스트는 컴퓨터 프로그램 류브카와 말 하나를 져주는 조건으로 8번 대결을 벌였지만 1승 4패 3무로 패한 것이 바로 그런 경우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전을 앞두고 국내 바둑계에서는 이세돌이 만약 지면 바둑대회에 찬바람이 부는 것은 아닐까 근심도 하는 것 같다. 20년 전 이미 컴퓨터에 열세를 인정한 체스계는 어땠을까. 다행스럽게도 그 일로 체스대회가 위축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체스전문 인터넷 사이트 플레이체스닷컴에 따르면 2013년 현재 세계 상위 10위권의 체스 프로들의 추정 상금 총액은 750만달러(90억원) 수준이다. 랭킹 1위인 노르웨이의 매그너스 칼슨의 경우 2013년의 추정 상금액이 220만달러(26억원)에 이른다. 카스파로프 이후 세계 대회 자체가 통합된다거나 하는 변화가 있었지만 상금 규모로 봤을 때 대회가 위축되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게다가 컴퓨터 체스의 보급으로 체스가 더 대중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인간 대 컴퓨터만이 아니라 컴퓨터끼리 대결하는 체스 세계대회도 활발하게 열리고 있다. 스마트폰 탑재 체스 게임의 인기는 꾸준하다.

이 대목에서 딥블루에 패했던 카스파로프가 인간끼리의 체스 대결에서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는 ‘어드밴스드 체스’라는 기술의 도입을 제안했다는 것에 눈길이 간다. 사실 카스파로프가 패배했던 딥블루와의 대국도 딥블루는 인간의 도움을, 카스파로프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치른 대결이었다. ‘어드밴스드 체스’ 제안은 당면한 인간과 기계의 우열이라는 관심사를 넘어서 어떻든 기계를 결국 인간 생활의 발전을 위해서 이용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세돌이 이기고 지는 것보다 이런 변화를 끌어내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그래야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결은 이세돌뿐 아니라 바둑계 전체로서도, AI 개발의 선도자라는 이미지를 확고히 할 구글에게도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범수기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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