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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칼럼] 두 종류의 새해, 두 종류의 탄생

입력
2016.01.1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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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두 종류의 탄생성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외면적 탄생’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내면적 탄생’이다. 외면적 탄생은 생물학적 생명을 지닌 존재로서의 탄생이며 달력의 시간인 ‘크로노스적 시간’과 관계되어 있다. 이 탄생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며, 유일한 사건이다. 반면 내면적 탄생은 의미의 시간, 즉 ‘카이로스적 시간’과 맺어져 있다. 전적으로 나의 의지와 결단에 의해 가능해지는 사건이며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1월(January)의 영어 말은 과거와 미래, 전쟁과 평화, 종국과 시작 등 현실 세계의 다양한 두 축을 상징하는 의미의 두 얼굴을 담고 있는 ‘야누스 (Janus)’라는 신의 이름을 담고 있다. 1월은 달력의 크로노스적 시간을 통해서 의미의 시간인 카이로스적 시간을 생각하게 하는 야누스적 시기이다. 미디어는 경쟁적으로 새해 이벤트를 보여주면서 달력의 새해가 마치 모든 것을 새롭게 해주는 마술적 힘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들뜨게 한다. 12월 31일에는 한 해의 마지막 날이라기 보다는 새해 전날(New Year’s Eve)로서 새해를 맞이하는 흥분된 모습들이 곳곳에서 등장한다. 달력 속의 새해가 과거의 어둠을 물리치고 전적 새로움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1월의 시작은 이렇게 삶의 기적과 같은 새로움으로의 막연한 기대 속에 우리를 붙잡아 놓는다.

그러나 달력 속 새해의 시작인 1월이 점차 기울어가면서, 우리 대부분은 새해 자체가 새로움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기대란 전적으로 환상일 뿐이라는 아픈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지점에 이른다. 달력의 새해에 자신을 맡겨 놓는다고 해서, 나의 삶에 새로움이 저절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달력 속의 크로노스적 새해는 생물학적 탄생처럼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는 것이지만, 카이로스적 시간인 의미의 새해는 나 자신의 철저한 의지, 개입, 그리고 열정에 의해서만 가능할 뿐이다. 나의 새해, 즉 카이로스적인 의미의 새해에 대하여 진지하게 성찰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의 삶에 대한 자신의 기대와 비전을 새롭게 형성하는 의도적 노력이 비로소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적 새해가 만나는 ‘나’의 새해의 문을 열게 한다. 내면적 탄생성에 의해 가능해지는 나의 새해인 카이로스적 새해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들을 필요로 한다. 첫째, 자신이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내면적 탄생성에 대한 믿음. 둘째,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지순한 열정. 셋째, 자신의 새로운 삶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새로운 내면적 탄생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그 내면적 탄생을 모색하는 포기하지 않는 열정, 그리고 그러한 새로움으로 시작되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란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에 대한 사랑에 의해 형성되고, 추구되고, 또한 실천적으로 작동되는 것들이다.

여기에서 낙관과 희망의 근원적인 차이가 있다. 미래에 대한 낙관은 구체적인 데이터들에 근거하지만, 희망은 수치화된 데이터에 근거하지 않는다. 희망이란 오히려 보이지 않지만, 자신 속에 새로움을 창출하고자 하는 치열한 열정과 믿음, 그리고 이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방식을 스스로 만들고자 하는 끈기 있는 개입에 근거하고 있다. 수치로 보이는 승리와 성공의 보장이 희망의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개별적 인간으로서 내가 지니고 있는 다층적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또한 이 현실세계가 보여주는 비관적 수치와 암담한 데이터들에도 불구하고, ‘나’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을 가지는 것은 의미의 새해를 만들어가기 위한 우리의 남아있는 희망의 몸짓이다. 더 나아가서 나의 생명과 다른 생명에 대한 치열한 사랑의 몸짓이다. ‘내가 나일 때 나는 네가 된다’는 파울 첼란의 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유의미하다.

‘헬 조선’이라는 신조어가 보여주는 한국사회의 암울한 현실 한 가운데에서, 그리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폭력들에 의하여 인간생명, 자연 생명, 동물 생명이 무참히 파괴되는 현실 한가운데에서, 달력 속의 크로노스적 새해는 결코 낙관할 수 없는 미래를 우리에게 암시한다. 그러나 살아남아 있는 우리는 이 어두운 절망적 현실 한 가운데에서, 암흑과 같은 현실 세계를 넘어서서 생명의 빛 줄기를 부여잡고 살아가야 하는 엄중한 책임 앞에 놓여 있다. 새로운 탄생성에 대한 갈망, 절망 한가운데에서 부여잡는 희망의 끈, 이 현실적 삶 속에의 치열한 개입, 그리고 새로운 삶에의 열정은 우리에게 내면적인 진정한 ‘나’의 새해, 카이로스적 새해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여기에서 ‘희망을 넘어서는 희망 (hope against hope)’을 기억하자. 이것은 도처에 상투적인 희망, 미사여구로 포장된 희망, 숫자로 계산되는 표피적 희망을 넘어서는 심오한 존재론적 희망이다. 이 우울한 절망적 세계를 넘어서는 ‘기적’이란, 결국 우리 속의 새로운 탄생성에 대한 믿음과 열정과 희망, 그리고 그 내면적 탄생성을 체현하고 살아내고자 하는 끈기 있는 개입을 통한 이 삶에의 사랑에 의하여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생물학적인 외면적 탄생에는 이미 내면적 탄생의 힘과 가능성을 본래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해야 한다. 우리 모두 이 외면적 탄생과 함께 주어진 가능성으로서의 내면적 탄생에 대한 믿음, 그 내면적 탄생으로 가능하게 되는 나의 카이로스적 새해에 대한 희망, 그리고 어둠으로 가득 찬 이 세계 한 가운데에서도 끈질기게 이 삶에의 사랑을 부여잡고, ‘나’의 새해를 향해 한 걸음을 떼는 연습을 해야 한다. 결국, 살아감이란 나의 존재로부터, 그리고 나의 내면적 탄생으로부터 시작되는 나의 새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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