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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결산] 헬조선의 흙수저들 "열정 같은 소리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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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결산] 헬조선의 흙수저들 "열정 같은 소리 하네"

입력
2015.12.2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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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언어는 시대를 담아낸다. 2015년에도 시대상을 반영한 신조어가 쏟아졌다. 사상 최악의 취업 절벽에 마주선 대학생들이 올해 가장 많이 사용한 말은 '금수저' '헬조선' 'N포세대' 순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면 취업도, 결혼도, 출산도, 내 집 마련도, 인간관계도, 꿈도, 희망도 포기해야만 한다는 청년들에게 지금의 대한민국은 지옥(hell)과도 같다는 자조다. 열정과 희망의 상징이던 청년세대가 왜 냉소하고 좌절했는지 되돌아봤다.

● 열정은 사는데… 일자리는 없네요

올해 초, 온라인 세상을 뜨겁게 달군 단어는 '열정페이(열정이 있으니 적은 월급은 감수하라고 강요하는 세태를 조롱하는 말)'였다. 지난해 청년유니온이 디자이너 이상봉에게 '청년착취대상'을 시상하면서 촉발된 열정페이 논란은 올해 상반기로 이어져 '장그래'(비정규직)로 대표되는 청년세대가 자신들의 그늘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인턴, 현장학습, 대외활동, 아르바이트…. 명칭만 달리했을 뿐 일자리에 대한 절박감을 빌미로 노동을 착취당하는 경험을 해봤다는 청년이 2명 중 1명 꼴이라는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의 조사도 나왔다. (▶유행어사전)

열정페이를 견디는 이유는 단 하나, 좋은 일자리를 갖고 싶어서다. 하지만 청년(15~29세) 비정규직 비율이 34.6%에 달한다는 통계에서 보듯 안정된 일자리는 적다. '청년 명퇴'라는 무시무시한 신조어가 말하듯 대기업 정규직도 안심할 순 없다. 청년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정부의 호언에 대한 불신도 깊어지고 있다. "10월 기준 청년 실업률은 7.4%로 2년 5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정부의 발표에 청년 구직자들은 "현실과 거리가 먼 통계"라며 냉소했다. 일주일에 1시간 이상만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도 모두 취업자로 분류하는 통계의 허술함이 빚어낸 오류라는 지적이 나왔다. (▶기사보기)

서울의 한 대학에서 사각모를 쓴 한 졸업생이 축하 꽃다발을 든 채 취업정보 안내판을 유심히 살펴 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의 한 대학에서 사각모를 쓴 한 졸업생이 축하 꽃다발을 든 채 취업정보 안내판을 유심히 살펴 보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 '노오력'해도… 금수저에겐 안돼요

열정페이가 만연한 배경에는 청년들이 원하는 분야에서 일할 수 있도록 배움과 경험의 기회를 제공했다는 사용자의 합리화 논리가 있다. 쥐꼬리 월급도 기꺼이 감수할 만큼 기회를 얻는 것 자체가 '하늘의 별 따기'인 세상이라는 방증이다. 이런 상황에서 불거진 사회지도층의 '채용 비리'는 청년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최경환 전 경제부총리가 지역구 사무실에서 일하던 인턴직원을 위해 중소기업진흥공단에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대표적이다. 해당 인턴직원은 36명을 선발하는 전형에서 2,299등의 성적으로 합격했다고 한다. (▶기사보기)

‘든든한 배경’이 없는 것보다 서러운 건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윤후덕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 김태원 새누리당 의원은 자녀 취업 청탁 의혹으로 논란을 자초했다. 신기남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아들이 로스쿨 졸업시험에서 떨어지자 압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에 휘말렸다. 때마침 연예계에도 배우 조재현의 딸 조혜정이 드라마 주인공에 캐스팅 됐다는 소식이 들려 금수저 논란의 도화선이 됐다. 온라인에서 우스갯소리로 떠돌던 수저계급론이 공론화된 계기다. (▶칼럼보기)

올해 인터넷커뮤니티에서 관심을 모았던 흙수저 빙고게임 중 하나. 인터넷커뮤니티 캡처
올해 인터넷커뮤니티에서 관심을 모았던 흙수저 빙고게임 중 하나. 인터넷커뮤니티 캡처

● 헬조선에서 흙수저로 살아가기

수저의 색으로 출생신분을 나누는 '수저계급론'은 누리꾼들이 만들어 낸 이론이다. 부모의 재산에 따라 자녀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결정된다는 '현대판 골품제'로 '헬조선(hell+조선)에선 아무리 노력해도 계층간 이동이 힘들다'는 상대적 박탈감에서 비롯됐다. 흙수저 청년들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 부모의 경제력이 자식에게 세습되는 한국에서의 삶은 마치 지옥(hell)과 같다"고 외쳤다. (▶칼럼보기)

헬조선 담론을 뒷받침하는 연구결과도 속속 나왔다.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는 저물어 계층이동 사다리가 끊겼고, 부의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사회 이동성 복원을 위한 교육정책의 방향' 보고서에서 사회경제적 지위의 세대(4세대)간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높은 교육열과 공교육 확대로 세대 간 계층 이동이 상승하는 시대가 지나고 계층이 대물림 되는 현상이 강해지고 있다"고 밝혔다. 김낙년 동국대 교수도 '한국에서의 부와 상속, 1970~2013' 논문에서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중요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칼럼보기)

금수저를 타고난 소수를 제외하면 먹고 사는 문제가 버거운 건 사실이지만, 가난만이 헬조선의 이유는 아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가 발표한 '2015 삶의 질' 통계에 따르면 우리 국민이 느끼는 삶의 질은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었다. 이밖에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출산율, 근무시간 많은 국가 1위, 국가부채 증가속도 1위, 대학교육 가계부담 1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어린이와 청소년 행복지수 등의 수치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민낯을 보여준다.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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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평등한 세상… "청년들이여, 분노하라"

헬조선을 살아내는 청년들에게 조언이 쏟아진 가운데, '분노하고 행동하라'는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얘기가 주목 받았다. 장 교수는 저서 '왜 분노해야 하는가'에서 최근의 양극화현상의 원인은 수저론으로 대변되는 자산불평등보다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이후 고착화된 임금불평등과 고용불평등이 기저에 깔려있다고 분석했다. 장 교수는 “기업의 원천적 분배가 제대로 작용하는 것이 소득 불평등 해소의 전제조건인데 지금의 불평등은 구조를 바꾸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며 “미래세대인 청년들이 선거를 통해 청년세대의 어젠다를 정치 어젠다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보기)

어찌됐든, 수저계급론은 총체적 난국에 빠진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를 수렴하며 불평등에 대한 논의를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해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학 교수의 저서 ‘21세기 자본’을 계기로 각계에서 불평등에 관한 담론이 쏟아져 나온 이후 자산불평등, 기회불평등, 임금불평등 등 각종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얼마나 큰지 보여준 사례다. 장하성 교수의 조언처럼 불평등한 세상에 좌절했던 청년들이 내년 4월 총선에서 과연 ‘세상을 바꿔가는’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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