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뜰 美, 처절 蘇, 느슨 獨, 허술 日... 후방지원 차이가 승패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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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 美, 처절 蘇, 느슨 獨, 허술 日... 후방지원 차이가 승패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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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30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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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2차대전 당시 냄비 등을 머리에 쓰고 뉴욕의 한 거리에 몰려나온 미국 아이들이 군수물자를 만들 알루미늄 공출의 호소하고 있다. 미국은 당시 세계 최대 생산력을 갖춘 국가였으나, 알뜰한 전시동원체제를 작동해 승리를 이끌었다.한국일보 자료사진

20세기 초까지도 유럽대륙 국가의 침공을 막아주는 든든한 장애물이었던 영국해협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질러 날아온 독일 폭격기들이 영국을 맹폭하던 1940년 8월 20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국민에게 호소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교전국에서 군인만이 아니라 남녀노소 막론하고 전국민이 전쟁에 참여합니다. 전선은 도처에 있습니다. 도시와 거리에 참호가 있습니다. 모든 마을이 요새입니다. 전선은 공장을 가로지릅니다. 노동자와 군인은 다른 무기를, 그리고 같은 용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처칠은 맞닥끄리고 있는 2차대전을 총력전으로 규정했다. 두 해 반이 지난 1943년 2월 18일에는 히틀러의 오른팔 요제프 괴벨스가 독일 베를린 스포츠궁전에서 이렇게 외쳤다. “나는 묻습니다. 여러분은 총력전을 원합니까? 여러분은 우리가 지금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총력적이고 근본적인 전쟁을 원합니까?” 대회장에 꽉 들어찬 열혈 나치당원들이 입을 모아 “예!”라고 화답했다.

근대적 총력전의 뿌리는 15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프랑스 혁명정부가 1793년 8월 23일에 공포한 ‘국민총동원령’의 의의를 독일 군사 사상가 가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일찍이 간파하고 ‘전쟁론’에 이렇게 썼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전투력이 1793년에 출현했다. 전쟁은 돌연히 전국민의 일이 되었다. … 국민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정부와 군대를 대신해 전체 국민의 비중이 힘의 균형을 좌우하게 되었다.” 1860년대 미국 남북전쟁에서 그 모습을 어렴풋이 내비친 총력전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정체를 드러냈다. 그러나 1차대전 교전국 가운데 가장 효율적으로 전시경제를 운용한 독일에서 전쟁을 이끌었던 에리히 루덴도르프 장군은 1935년에 펴낸 ‘총력전’에서 그 전쟁을 실패한 총력전으로 평가했다. 국력을 빠짐없이 동원해 전쟁을 수행하는 진정한 총력전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 완성된 형태의 총력전을 보려면 역사의 페이지를 제2차 세계대전으로 넘겨야 한다.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각 교전국 군대는 땅과 바다와 하늘의 전선에서 지옥의 장면을 연출하며 싸웠다. 다섯 해 넘는 기간 동안 전쟁에 소비되는 물량은 막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연히 보급이 더없이 중요해졌다. 1941년 11월 6일에 “현대전은 자동차의 전쟁이다. 자동차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쪽이 전쟁에서 이긴다”고 말한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핵심을 깨달은 셈이다. 독일의 공격에 밀려 벼랑 끝에 몰렸던 소련이 전세를 뒤집고 베를린까지 쳐들어갈 수 있었던 데에는 무기대여법을 통해 얻은 튼튼하기 이를 데 없는 미제 트럭이 한 몫을 했다. 보급보다 더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전선에 갈 물자를 만들어내는 또 다른 전선의 성적이었다. 그 전선은 후방, 총후, 또는 국내전선으로 불렸다.

주요 교전국이 자국 국내총생산의 절반 이상을 군수로 돌리는 상황에서 후방에는 사람도 물자도 턱없이 모자랐다. 남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면서 국민의 사기를 올려 생산성을 최고 수준으로 유지하지 않으면 패전을 피할 수 없다. 이기려면 후방이 시계 속 톱니바퀴처럼 오차 없이 돌아가야 한다. 시행착오가 없을 수 없었다. 사람이 먹을 것도 없다며 애완동물 사료 생산을 멈췄더니 고양이가 굶어 죽는 바람에 쥐가 들끓어 식량이 축나는 일이 벌어졌다. 전쟁통에 무슨 오락이냐며 영화관을 닫았더니 노동자의 사기가 떨어져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인력과 자원을 무턱대고 동원하기보다는 정교하고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했다. 총력전은 선언됐지만, 후방 동원의 효과와 특성은 교전국마다 다 달랐고 나름의 특성을 띠었다.

영국은 강제성과 자발성을 적절히 배합해가며 후방을 동원하면서도 자발성을 더 강조했다. 신분제가 잔존하고 국력이 내리막길을 걷던 상황에서 전시의 내핍 생활은 상하층 통합의 분위기를 새로 조성했다. 전시의 고난을 참고 견디면 사회복지를 보장하겠다는 지배계급의 약속에 일반 국민이 호응했다. 후방의 사기는 줄곧 높았고, 전쟁을 겪으면서 영국은 복지국가로 나아갔다. 한편 미국은 세계 최강의 산업국가이면서도 자원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았다. 민수용 차량 생산이 멈추고 소비재 공장이 군수 공장으로 속속 전환했고, 악단의 색소폰까지 공출하고 어린이들까지 고철 수집에 나서서 자원을 아꼈다. 치렁치렁하던 머리카락을 스카프로 질끈 동여매고 팔뚝의 알통을 내보이는 전시 포스터의 “리벳공 로지”가 한둘이 아니어서, 가정(home)을 가꾸던 여성이 국내전선(home front)에서도 한 몫을 단단히 했다.

그림 21944년 12월에 대공습으로 파괴된 상황에서도 성탄절 장식물과 휴일 할인판매 광고가 나붙은 독일 쾰른 도심. 지나친 내핍으로 인한 국민사기 저하를 우려한 나치는 전쟁 중 느슨한 동원체제를 유지했다.출처 한국일보 자료사진

히틀러는 “소련이라는 썩은 집은 문짝만 걷어차도 허물어진다”고 큰소리쳤지만, 썩었다던 그 소련 체제는 극심한 위기에서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했다. 적군이 바로 코앞에 다가온 상태에서 노동자들이 공장 설비에 개미처럼 달라붙어 기계를 낱낱이 분해해 열차나 트럭에 실었다. 1941년 8~9월에 소련의 군수 공장은 철도와 도로 위에 있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1941년 후반기에 2,593개가 넘는 산업체가, 그리고 노동자들과 그들의 가족 2,500만 명이 전화가 미치지 않는 동쪽으로 소개되었다. 안전한 후방이라고는 하지만 상황은 혹독해서, 소개된 공장의 3분의 2가 변변한 건물도 없이 노천에서 재가동했다. 한 탱크 공장에서는 여성 노동자 8천 명이 땅을 파내 만든 움집에서 살며 밤낮없이 기계를 돌렸다. 1942년 8월에 농산물 55%, 석탄 65%, 금속 60%를 산출하던 지역을 독일에게 빼앗긴 소련은 쪼그라든 경제를 풀가동해서 독일의 압박을 버텨냈다. 전쟁 전인 1920,30년대부터 워낙 내핍에 익숙해져 소련 시민은 다른 교전국 국민보다 극한적인 생활을 더 잘 견뎌내며 군수물자를 더 많이 생산해냈다.

독일에서는 스탈린그라드에서 충격의 패배를 맛본 1943년 2월에야 괴벨스가 부랴부랴 총력전 선언을 하고 “나치의 엔지니어” 슈페어의 지휘 아래 후방을 죄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군수공장에서도 밤샘 근무가 없었고, 일손이 모자라면 외국인 노동력을 활용했다. 주로 프랑스인 강제징용자와 소련인 전쟁포로 1,500만 명이 독일에서 노예처럼 일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지나친 내핍으로 국민의 사기가 떨어지는 바람에 단결이 흐트러져 졌다고 생각한 히틀러는 후방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는 데 골몰했다. 코카콜라 원료 수입이 막히자 독일의 공업은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활용해 만든 대용품을 내놓아 국민의 입맛을 달랬다. 그 대용품이 바로 환타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실존 인물인 오스카르 쉰들러가 유대인 노예 노동력을 투입해서 가동하던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은 법랑냄비였다. 전시에 법랑냄비 같은 소비재를 만든다는 것은 소련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전쟁 중반까지 독일의 국력을 절반밖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괴벨스의 평가는 빈말이 아니었다. 슈페어 군수장관은 “내핍이 필수적이며 소비를 절제하고 문화 행사를 제한해야 한다고 히틀러를 설득하기란 힘든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좀처럼 정치문제에 나서지 않던 히틀러의 애인 에바 브라운마저도 퍼머 약과 화장품의 생산이 금지되려 한다는 소식을 듣자 히틀러에게 화를 냈고, 히틀러는 곧바로 흔들렸다. 괴벨스도 1943년 3월 12일 일기에 “여성 미용품에 관해 조금은 관대해져야 할 듯하다”고 적는 판이었다. 괴벨스의 권력이 더 커질까 샘을 낸 다른 나치 지도자들이 후방 동원에 협조하지 않은 탓에 독일의 총력전 체제는 끝까지 손발이 맞지 않았다.

그림 3일본 여학생 3명이 선반 다루는 기술을 익히고 있다. 이 미숙한 노동자들은 그들이 대체한 남성 노동자들의 생산량을 따라가지 못했다. 일본은 2차대전 당시 숙련공을 전선으로 내몰고 후방 군수공장은 미숙련공으로 대체하는 허술한 대처로 가뜩이나 열세인 군수품 조달능력을 더 낙후시켰다.출처 한국일보 자료사진

중일전쟁을 치르며 1938년부터 총력 체제를 선언한 일본은 1941년에 전쟁 참여를 가정하고 국력 판단을 했는데, 두 해 뒤에는 물자 부족으로 수세에 몰린다는 결론이 나왔다. 초조해진 일본은 1942년 2월에 소비 50% 절감을 시도하고 1943년에는 국민징용령을 내리고 말기에는 “1억 옥쇄”를 요란히 선전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과달카날 전투에 선박을 대량 징발하자 수송에 차질이 빚어져 기초자재 생산량이 뚝 떨어졌는데, 대외의존도가 높고 자원을 해외에서 열도로 날라야 하는 일본 경제의 특성을 무시한 탓이었다. 인력 동원도 미흡해서 1940년과 1944년 사이에 여성 노동력이 140만명 늘어나는 데 그쳤고, 부유층 가정에서 일하는 하녀가 1944년에도 무려 60만명이었다는 사실은 인력 활용의 비효율을 잘 보여준다. 일본 정부는 후방 동원을 싸움터로 전국민 보내기 쯤으로 여겨서 숙련공을 전선으로 보내고 그 빈 자리를 기계에 서툰 여학생으로 채웠고, 산업을 전쟁에 동원하려는 군부와 전시에 이윤을 올리려는 민간기업의 갈등을 조정하는 데 서툴렀다.

영국의 국내전선은 탄탄했고, 미국의 국내전선은 알뜰했고, 소련의 국내전선은 처절했고, 독일의 국내전선은 느슨했고, 일본의 국내전선은 허술했다. 이런 차이가 제2차 세계대전을 판가름한 것이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 유럽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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