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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문예지 ‘후장 사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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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칙한 문예지 ‘후장 사실주의’

입력
2015.11.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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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문인들이 만든 문예지 '후장 사실주의' 1호
젊은 문인들이 만든 문예지 '후장 사실주의' 1호

이달 초 열린 독립출판물 축제 ‘언리미티드 에디션’에 수상한 문예지 한 권이 출품됐다. 양장본에 사진 한 장 없는, 외양은 영락 없는 단행본이지만 표지엔 ‘analrealism vol. 1’이라고 쓰여 있다. 소설가 정지돈, 박솔뫼, 오한기, 이상우, 평론가 강동호, 서평가 금정연, 편집자 황예인, 홍상희씨 등 젊은 문인 8인이 자비를 털어 출간한 문예지 ‘후장 사실주의’ 1호다.

후장(後腸)사실주의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정지돈 작가가 3년 전 장난처럼 꺼낸 말이 언젠가부터 문학상 심사 자리 등에서 마치 비평 용어처럼 쓰이더니, 채 뜻이 정립되기도 전에 잡지가 나온 것이다. 책 안쪽은 한층 더 모호하고 수상쩍다. 문학평론가 신형철, 소설가 백가흠씨 등이 희곡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소설가 백민석씨와 한 인터뷰는 마치 검열을 당한 양 상당 부분이 공란으로 비워져 있다. 칭찬연구소 소장 신형철씨가 미셸 우엘벡에게 납치 당해 죽는 바람에 세상에서 칭찬이 사라지자 미래 사회에서 전사를 급파, 그를 살려낸다는 희곡은 대체 무슨 의도로 쓰인 것일까.

8인은 서면 인터뷰에서 “후장사실주의는 로베르토 볼라뇨의 소설에 등장하는 문예사조 ‘내장(內裝)사실주의’를 패러디한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다”며 “모인 사람들끼리 통일된 이념이나 공유하는 철학은 없고 그저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고 뜻을 같이 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의미를 채워 넣지 않은 단어는 그 자체로 집단의 성격을 암시한다. 역사상 수많은 전위그룹이 의미 없는 ‘미친 짓’을 통해 기존의 세계를 비웃은 것처럼, 후장사실주의도 진지한 비판과 그에 따른 방향 제시보다는 익살스런 패러디를 통해 기성 질서를 조롱하거나 모른 척 한다. 그러나 백민석 작가와 8인의 대화 속에서 나온 “문학하는 애들이 길들여졌다” “모든 출판사가 (…) 서사 위주의 소설에만 상을 주고 히트작을 내고 싶어서 안달이 난 상태” 같은 발언에는 이들이 기성 문단에 대해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 직ㆍ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이들은 서면 인터뷰에서 “확실히 체감되는 건 한국문학이라는 용어에 대해 반응해온 독자들의 퓨즈가 완전히 꺼져버렸다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기성 문단의 무엇을 부정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후장사실주의는 아무 것도 부정하지 않고 또는 모든 것을 부정하지만, 사람들이 기존의 것들을 부정하거나 비웃는 데 이 말을 사용한다면 굳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

꺼져버린 독자들의 ‘퓨즈’를 되살리겠다는 친절한 약속도 없이, 잡지는 초판 1,000부 중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만 250부가 팔렸다. 후장사실주의자들은 책에 실린 희곡을 영화로 만들기 위해 내년 여름 삼척이나 훗카이도로 촬영을 떠날 예정이라고 했다. 또 “마음 내킬 때” 2호를 출간할 계획이며 인터뷰이로 김기덕 감독 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젊은 문인들의 도발이 문단에는 어떤 신선함을 몰고 올까. 이들은 ‘후장 사실주의’가 문학권력 논쟁 이전부터 기획된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올해 신경숙 표절 논란 이후 쏟아져 나온 전복적 움직임의 첫 줄에 이 잡지가 놓이지 않을 수 없다. 한 중견 평론가는 “2000년대 초반 시단에 등장했던 미래파 시인들처럼 새롭고 실험적인 움직임에는 늘 찬반이 갈리게 마련”이라며 “자본에서 완전히 독립된 젊은 작가들이 기존 세계를 불신하고 새로운 현실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는 점에서 상당히 기대되는 잡지”라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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