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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칠하고 접고… 나는 나를 만날 권리가 있다

입력
2015.10.2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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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고요히 시를 옮겨 적다 보면 과열된 자아가 가라앉는다. 교사 박주희씨의 라이팅북. 박주희씨 제공
혼자 고요히 시를 옮겨 적다 보면 과열된 자아가 가라앉는다. 교사 박주희씨의 라이팅북. 박주희씨 제공

중학교 교사인 박주희(30)씨는 학생들에게 언성을 높일 것 같은 순간이면, 조용히 교무실로 돌아가 필사책(라이팅북)을 펼친다. 연필꽂이에서 캘리그라피용 펜을 꺼내 시를 베껴 쓰기 위해서다.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황지우의 ‘뼈아픈 후회’) ‘밤이 오고 종은 울리고 세월은 가고 나는 남았네’(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 같은 구절을 베껴 쓰고 있노라면 과열된 자아가 차분히 가라앉으면서 어느새 분노가 잦아드는 게 느껴진다.

과도한 업무강도에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까지, ‘나는 교사니까’ ‘세상 살다 보면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 생각하며 억눌러왔던 스트레스의 둑이 마침내 올해 터졌다. “왜 담고만 있어야 하나, 왜 사회는 나의 스트레스를 표출하지 못하게 하나, 반발심이 생기던 차에 우연히 서점에서 라이팅북을 봤어요. 혼자서 조용히 스트레스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으로 ‘이거다’ 싶더라고요.”

필사를 시작한 후 아이들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화가 치솟았다가도 시의 아름다운 언어로 생각을 가다듬은 후 아이들을 마주하면 차분하고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박씨는 “이제 교무실 자리에 앉아 캘리그라피 펜을 꺼내 들면 동료교사들이 ‘또 무슨 일이야?’ 농담을 할 정도”라며 “사회생활을 하면서 나 자신과 만날 시간이 너무 부족했는데 필사는 특별히 시간을 내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나를 다시 돌아볼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혼자 조용히 하는 안티 스트레스 활동이 인기다. 종이접기와 색칠하기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고은정(왼쪽)씨와 류은하씨. 고영권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혼자 조용히 하는 안티 스트레스 활동이 인기다. 종이접기와 색칠하기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고은정(왼쪽)씨와 류은하씨. 고영권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단순한 몰입… 나를 만난다

초고도 스트레스 사회, 스트레스 해소의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노래방도, 술자리도, 운동도, 여행도, 쇼핑도, 더 이상은 아니다. 이제 사람들은 베껴 쓰고, 색칠하고, 종이 접고, 조립하며 고요히 내면으로 침잠한다. 단순한 몰입을 통해 소진되고 마모된 자아와 접속하기. 혼자 조용히 할 수 있는 ‘안티 스트레스 활동(Anti-stress activity)’이 새로운 힐링 테라피로 각광받고 있다. 색칠놀이, 필사책, 종이접기, 나노블록, 펄러비즈 등 영어의 ‘No-brainer’(정신적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쉬운 작업)로 지칭할 수 있는 활동들이 주로 여기에 해당한다.

LG유플러스 자회사에서 차장으로 일하고 있는 류은하(42)씨는 색칠놀이 마니아다. 회사와 집에 각각 여러 권의 컬러링북을 가져다 놓고 점심시간이나 쉬는 시간에 짬짬이 카버-파스텔로 색연필세트를 꺼내 채색을 한다. 사람 만나 어울리기 좋아하는 활달한 성격이라 주변에서는 “요즘 왜 이래?” “술이나 마시지 웬 색칠공부냐?” 같은 반응을 보이지만, 류씨에게 이 시간은 자기 자신에게 주는 선물과도 같다.

처음에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였던 ‘비밀의 화원’이나 ‘마법의 숲’ 같은 디자인적 요소가 강한 도안을 색칠했는데, 크게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그러다 올 초 성인들을 위한 컬러링북 시장이 본격적으로 형성되면서 다양한 테마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류씨가 특히 좋아하는 건 해외여행의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유럽 주요 도시 컬러링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도문에 성화를 매칭한 컬러링북. “비용도 크게 안 들고, 특별한 장소에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 부담 없고 편하죠. 책이나 게임은 거기에만 집중해야 하고, 음악은 듣다 보면 멍해지잖아요. 컬러링은 복잡한 생각들을 떨칠 수 있으면서도 나 자신을 떠올릴 수 있어 참 좋더라고요.”

류은하씨가 채색한 피렌체의 정경. 고영권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류은하씨가 채색한 피렌체의 정경. 고영권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전 세계적으로 열풍이 불고 있는 컬러링북은 빠른 속도로 테마와 소재를 확장해가며 시장을 키워나가고 있다. 초기의 자연물 소재에서 벗어나 반 고흐나 뭉크 같은 세계적 화가의 명화, 패션일러스트, 성경이나 경전의 명장면, ‘어벤저스’ 같은 만화, 세계 도시 풍경 등으로 선택의 폭이 무궁무진하게 넓어졌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중인 컬러링북만 270여종. 올 한해(10월 중순 현재) 교보문고에서만 27만부 이상이 판매됐으니 가히 열풍은 열풍이다. 자신이 채색한 도안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리거나 친구와 지인들에게 선물하는 것도 새로운 풍속도로 떠올랐다. 처음으로 라이팅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와 필사책 신규 시장을 형성한 김용택 시인의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도 6월 출간된 이래 3만부가 팔려나가며 시 분야 베스트셀러 3위에 올랐을 정도로 반응이 좋다.

류씨는 “피렌체나 삿포로처럼 좋았던 여행장소를 색칠하고 있으면 정서적으로 따스해지고 릴랙스되는 느낌”이라며 “스스슥 색연필 움직이는 소리만으로도 힐링이 된다”고 말했다. 색칠해놓은 책장을 넘기다 보면 지나쳐온 감정의 지도가 보이기도 한다. 기분이 밝을 때는 보라색을 써도 라이트를 쓰고, 어두울 때는 다크나 미들을 쓰는 식이다. 한 장의 그림에서 서로 다른 기분들이 보일 때, 내가 이렇게 치유됐구나 싶기도 하다고.

종이접기는 김영만씨의 TV 출연 이후 안티 스트레스 활동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종이나라 제공 작품. 고영권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종이접기는 김영만씨의 TV 출연 이후 안티 스트레스 활동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종이나라 제공 작품. 고영권기자 youngkoh@hankookilbo.com

온전히 혼자인 충만한 시간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닌 시대. 수백, 수천 명에 달하는 페이스북 친구들이 실시간으로 소식을 알려오고, 소통하면 소통할수록 공허도 커지는 가상의 네트워크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과도하다는 말로는 형용할 도리 없는 살인적 업무량은 자려고 누운 순간마저도, 때로는 자고 있는 수면의 와중에도 의식을 작동시킨다. ‘이 일을 이렇게 해야 하는데’와 ‘저 일은 이때까지 해야 하는데’의 속박 속에서 대체로 우리는 홀로 있어도 자아를 상실한 상태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초등교사인 고은정(39)씨는 종이접기에 빠졌다. 아침에 눈을 떠서 잠들 때까지 끊임없이 말을 해야 하는 그에게 종이로 티라노 공룡을 접고, 하이힐을 접고, 케이크와 티세트를 접는 시간은 “입을 닫고 나를 쉬게 하는 힐링의 시간”이다. “제 주위에 자극이 너무 많다고 느껴요. 제가 걱정 근심이 많은 타입이라 저녁 먹은 설거지를 할 때까지 낮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종이접기를 하면 그게 싹 잊혀져요. 누가 이랬지, 누가 저랬지 하는 끊임없는 망상과 잡념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종이접기죠. 여기에만 집중하다 보면 나 자신을 다시 찾을 수 있더라고요.”

올 7월 종이접기의 대가 김영만씨가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 출연하며 신드롬에 가깝게 재발견됐던 종이접기는 색종이 매출을 통해서도 그 인기가 확인된다. 7월이 전통적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전년 대비 색종이 매출이 두 배나 늘었으며, 8월과 9월에는 대형마트나 문구시장의 약세와는 달리 다이소에서 20%의 매출 신장률을 보였다. 어린이가 아닌 성인들이 색종이의 새로운 소비자로 유입됐음을 보여주는 지표다.

힘들고 괴로우면 사람을 만나 술잔을 기울이던 시대는 이제 끝난 걸까. 필사로 스트레스를 푸는 박주희씨는 “20대에는 주로 사교적 만남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었지만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로 많이 지쳤던 듯하다”며 “30대에 들어선 지금은 스스로 내면을 돌아보는 것이 훨씬 더 스트레스 해소에 효과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종이접기를 주로 하는 고은정씨는 “사회 전반적으로 사람들이 너무 치여 산다. 자식들 크는 모습도 못 보고 출근해 쥐꼬리만한 월급 받고 밤이 늦도록 일만 하는 삶이 보편적이다 보니 모두가 불안하고, 모두가 날이 서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힘든 건 자기 자신이 풀어야지 누가 풀어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혼자서 스스로를 다스리고 수양하는 시간을 사람들이 갈구하는 것 같아요. 대인관계가 힘들어 힐링이 필요한 거니까요.”

그런 면에서 안티 스트레스 활동에 몰입하는 사람들은 오타쿠나 외톨이와는 다르다. 이 홀로 있음은 역동적 고독의 상태로 일종의 ‘움직이며 하는 명상’ 같은 것이다. 안식일이나 안식년과 비슷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몰입의 즐거움, 작지만 반복되는 성취감, 새로운 대화와 소통의 매개 등 안티 스트레스를 넘어서는 뜻밖의 순기능들도 있다.

내 안의 작은 예술가를 찾아라

안티 스트레스 활동이 ‘No-brainer’에 해당하는 작업들이긴 하지만, 여기엔 명백히 예술적 요소가 개입돼 있다. 색칠은 미술, 필사는 문예, 종이접기는 공예에 해당한다. 도안 홈에 작은 구슬을 끼워 박은 후 다리미로 눌러 녹이는 펄러비즈나 작고 미세한 블록으로 다양한 형태의 조립품을 만드는 나노블럭, 예쁜 손글씨 캘리그라피 등도 각기 공예와 서예에 해당한다. 단순히 내면의 어린이를 바깥으로 내놓는 키덜트 문화의 일면이라기보다는 예술치유, 아트 테라피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봐야 한다.

캘리그라피도 상당한 수준으로 연마한 필사 애호가 박주희씨는 “원래 책 읽고 시 쓰는 것을 좋아했지만 사회에 나온 후 따로 시간을 내기는 너무 어려웠다”며 “한 자 한 자 옮겨 쓰다 보면 시의 의미를 저절로 음미하게 되니까 내가 잊고 있었던 시간들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은정씨도 “미술에는 영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종이접기를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예술적 성취감을 느낀다”고 했다.

안티 스트레스 활동이 실제 예술치유의 효과가 있을까? 뉴욕시 스트레스 관리ㆍ상담센터의 임상심리학자인 앨런 엘킨 박사의 책 ‘멍청이들을 위한 스트레스 관리’에 따르면, 컬러링이나 뜨개질처럼 명상적 효과를 갖는 작업들은 걱정 근심으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킴으로써 치유적 효과를 유발할 수 있다. 또 이런 창조적 취미를 갖는 것은 직장에서의 업무수행능력도 향상시키는 것으로 입증됐다. 하지만 그것을 치료라고 부르기에는 효과가 제한적이다. 예컨대 컬러링의 경우, 자유롭게 소재를 선택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닌 이미 완성된 밑그림에 채색만 하는 것이라 치료에 반드시 필요한 심층적인 내면의 표출에 한계가 있다. 그러나 또 어떠랴. 숨어 있던 내 안의 작은 예술가를 꺼내놓고, 한때의 분노와 불안을 다스릴 수 있다면, 이 또한 좋지 아니한가.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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