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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영혼까지 보듬는 순교의 성지

입력
2015.10.0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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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 옆 옛 YTN건물에 자리한 한국일보 새 사무실에서는 서울역과 이어지는 기찻길이 내려다 보인다. 까만 레일을 따라 눈길을 옮기다 보면 어느 순간 직사각형의 초록 공간이 나타난다. 역 주변의 휑하고 삭막한 풍경과 대비되는 저 숲이 바로 서소문 공원이다.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 고단한 사람들의 휴식처

이 기찻길 옆 공원은 지난해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문하기 전까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크기가 작고 별다른 시설이 없어 찾는 이가 많지 않았다. 그런 서소문 공원을, 교황이 빠듯한 방한 일정을 쪼개 방문한 것은 한국 최대의 순교성지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를 거치며 100명 이상이 순교했다. 1984년 성인 반열에 오른 순교자 44위, 교황이 지난해 복자 반열에 올린 순교자 27위가 여기서 목숨을 잃었다.

이곳은 본래 조선의 공식 형장이어서 일반 범죄자의 처형도 이뤄졌다. 이 일대 현재 모습을 보면 의아하겠지만 당시에는 그럴 만도 했다. 유교 경전 ‘예기’에 “형장은 사직단의 우측에 있어야 한다”고 돼 있는데 조선 정궁인 경복궁에서 바라보면 서소문은 사직단 우측에 해당한다. 게다가 부근에 칠패시장이 있고 유동인구가 많아 경각심을 주기 좋았고 만초천이라는 개천이 흘러 처형 후 수습이 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만초천이 복개돼 흔적조차 찾기 어렵고 칠패시장은 중림시장으로 명맥이 이어졌으나 규모가 크게 줄어 당시 형장의 어지러운 풍경을 상상하기 어렵다. 칠패시장 상인들이 기해박해 당시 설날을 앞두고 시장에 피바람이 불면 안 된다며 천주교인 처형에 반대했고 이 때문에 10명은 인근 용산 당고개에서 형이 집행되기도 했다.

교인들은 혹세무민과 대역죄 등으로 포도청에서 문초를 받은 다음 형조나 의금부로 옮겨져 판결을 받고 형장으로 이송됐다. 그들을 태운 소달구지가 서소문 형장 부근에 이르면 포졸들이 소를 채찍질해 빠른 속도로 언덕을 내려가게 한 탓에 교인들은 형장에 닿기도 전에 반 죽음 상태가 됐다. 그들은 그렇게 혼절하다시피 한 상태에서도 담담하게 죽음을 맞았다.

순교자의 의연한 죽음을 기리는 현양탑 앞에선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 미사가 거행된다. 지난해 교황 방문 이후엔 현양탑 앞에서 손 모아 기도하는 이가 평일에도 많다.

한 수녀와 젊은이들이 서소문 공원 안 현양탑 앞에서 천주교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2015-10-08(한국일보)
한 수녀와 젊은이들이 서소문 공원 안 현양탑 앞에서 천주교 순교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2015-10-08(한국일보)

최근 서소문 공원이 천주교 성지로 부각되긴 했지만 교인이나 순례자만을 위한 공간은 아니다. 힘들고 고단한 사람들이 이곳에서 휴식을 취한다. 공원 풀밭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수건이나 신발을 빨아 말리는 사람도 있다. 기차 소리가 끊이지 않아 어수선하긴 해도 촘촘히 심어진 나무 그늘 아래서 지저귀는 새 소리를 들으며 힘겨운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다.

●한국 최초의 고딕양식 벽돌조 성당

서소문 순교성지를 관리하는 곳은 인근 약현 성당이다. 약재가 많이 나고 약재 거래가 활발해 약현이라고 불렀던 동네다. 성당 입구에서 본당을 향해 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몸도 마음도 어느 순간 차분해진다. 성당은 1892년 완공된, 한국 최초의 고딕양식 벽돌조 건물이다. 1998년 술 취한 행려자의 방화로 내부가 많이 소실됐지만 이듬해 9월 옛 모습대로 복원됐다. 요즘처럼 날 좋은 계절에는 본당의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기도하고 명상할 수 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약현 성당은 서소문 성지를 내려다보며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리고자 이곳이 자리했는데 지금은 주변에 고층 건물이 많아져서 성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약현성당은 호젓하고 분위기가 좋아 교인뿐 아니라 주민들도 많이 찾아온다. /2015-10-08(한국일보)
약현성당은 호젓하고 분위기가 좋아 교인뿐 아니라 주민들도 많이 찾아온다. /2015-10-08(한국일보)

성당은 주민에게도 소중한 장소다. 찻길을 오가는 자동차와 중림시장을 찾는 사람들로 번잡한 동네지만 성당 안은 생각보다 호젓하다. 가끔 결혼식도 하고 유치원 꼬마들이 나들이하기도 한다. 본당 앞 작은 숲에는 새들이 분주히 오간다. 가을로 접어든 요즘은 새들이 움직일 때마다 나뭇잎이 하나씩 떨어진다. 저 아래 도로의 소음을 새 소리, 벌레 소리가 잊게 한다.

성당 안에는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이 있다. 이 아담한 전시관에 열 여섯 성인의 성해를 비롯해 옛 교리서, 신심서적, 전례서 등이 전시돼 있다. 서소문 형장에서 스러진 순교자를 소개하고 신자들의 당시 삶을 보여주는 닥종이 인형도 볼 수 있다.

약현성당 안 작은 숲에 있는 정하상 석상. 정약종의 둘째 아들 정하상은 기해박해(1839) 때 서소문 성지에서순교했다. 정약종은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신유박해(1801) 때 아들에 앞서 서소문 성지에서 순교했다. /2015-10-08(한국일보)
약현성당 안 작은 숲에 있는 정하상 석상. 정약종의 둘째 아들 정하상은 기해박해(1839) 때 서소문 성지에서순교했다. 정약종은 다산 정약용의 셋째 형으로 신유박해(1801) 때 아들에 앞서 서소문 성지에서 순교했다. /2015-10-08(한국일보)

●옛 추억 어린 시장과 대한민국 1세대 아파트

성당 오른쪽의 중림시장은 칠패시장을 이어받았다. 이현(배오개), 종가(종로)와 함께 18세기 서울의 상업중심지였던 칠패시장은 마포와 서강에서 들어오는 생선을 많이 취급했다. 일제 때 경성수산시장으로, 광복 후 중림시장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지금은 노량진수산시장과 대형 마트를 찾는 사람이 늘어 시장 규모가 크게 줄었다. 주요 취급물인 해산물을 이른 시간에 주로 거래하기 때문에 낮에는 한산해 보인다.

중림시장을 오랜만에 찾았더니 30여 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1980년대 초반 대학 입시를 위해 친구들과 밤 기차를 타고 올라왔었다. 부산에서 온 우리에게 서울의 1월 새벽 추위는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한 가혹한 것이어서 서둘러 찾아 든 숙소가 중림시장 여인숙이었다. 퀴퀴한 방 하나에서 친구 10명 이상이 뒤엉켜 웃고 떠들고 다투며 이틀 밤을 보냈다. 방 값이 얼마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도 터무니 없이 싸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그 여인숙을 찾기 위해 돌아다녔으나 동네가 바뀌고 새 건물이 들어서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었다.

성당의 오른쪽 골목에는 노란색 아파트가 있다. 성요셉아파트라는 이름의 이 아파트는 1971년 건축됐다. 약현 성당이 수익 사업으로 건축했으며 입주자는 주변 시장 상인이 많았다. 40년이 훌쩍 넘은 낡은 아파트지만 건축적으로는 의미가 크다. 대한민국 제1세대 아파트로서, 골목을 따라 자연스럽게 선형으로 배치됐고 경사를 따라 건물 층수가 3층에서 6층으로 변한다.

약현성당 옆 경사진 골목을 끼고 있는 성요셉아파트. 대한민국 1세대 아파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2015-10-08(한국일보)
약현성당 옆 경사진 골목을 끼고 있는 성요셉아파트. 대한민국 1세대 아파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2015-10-08(한국일보)

●불탄 매국노의 집터와 달동네 풍경 간직한 마을

성요셉아파트를 끼고 올라가면 중림동 주민센터와 부근의 작은 집들이 나오는데 매국노 이완용이 이 곳의 저택에서 살았다. 이완용이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는데 앞장서자 분노한 민중이 그의 집을 불지르고 조상의 신주를 태웠다. 이로 인해 이완용은 남산의 왜성구락부, 장교동의 이복 형 집 등을 전전했다. 이완용은 그 뒤 1911년 인사동 순화궁터에 건물을 지었고 1913년에는 옥인동에 저택을 지어 이사했다. 옥인동으로 옮긴 뒤 순화궁터 건물은 태화관이라는 요릿집이 됐다. 그 태화관에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는데 이완용은 그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이듬해 태화관을 기독교 남감리회 여선교부에 매각했다. 이완용의 옥인동 집은 3,000평이 넘는 큰 집터에 들어선 대저택이었다.

호박마을의 모습. 골목이 좁고 집이 낡았다. /2015-10-08(한국일보)
호박마을의 모습. 골목이 좁고 집이 낡았다. /2015-10-08(한국일보)

이완용 집터와 서소문로 사이에는 요즘 서울에서 보기 드문 달동네 풍경이 있다. 좁은 골목과 시멘트 담벼락, 벗겨진 페인트칠, 방수천을 덮은 지붕. 어떤 집에는 아직 사람이 사는데 또 어떤 집은 비어있다. 한때 호박 넝쿨이 무성해 지금껏 호박 마을로 불리는 동네다. 마을을 둘러보니 어렸을 때 살던 동네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하지만 이곳도 조만간 어떤 식으로든 변할 것으로 보인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얼마 전 중림동을 방문해 호박 마을의 용적률을 높여 재개발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사람이 편안하고 쾌적하게 살 수 있는 동네, 돈 없는 주민을 쫓아내지 않는 개발이 됐으면 좋겠다.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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