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을 때다. 우연찮게 한 원로배우와 함께 어느 행사 자리로 향하게 됐다. 행사장 앞에는 레드 카펫이 깔려있고 팬들의 환호와 카메라 플래시가 작렬했다. 인기 정점의 젊은 배우들이 당당하게 행사장으로 입장했다. 한때 홍콩까지 진출했던 충무로의 노배우는 레드 카펫을 벗어나 조용히 쪽문으로 들어갔다. 젊은 팬들의 환호는 이제 그의 몫이 아니라는 걸 잘 아는 몸짓이었다. 어제의 스타가 오늘에도 빛나기 어려운 대중문화계의 비정한 현실을 절감했다.
지난 3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한 호텔에서 제3회 마리 끌레르 아시아 스타 어워즈 행사가 열렸다. 대상에 해당하는 올해의 배우상 시상을 위해 배창호 감독이 무대에 올랐다. 배 감독은 “예전에 함께 일할 땐 너무 시대를 앞서가는 배우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시대가 이 배우를 알아주는 것 같다”며 수상자를 호명했다. 이정재가 날듯이 무대 위에 올랐다. 상을 주고 받은 뒤 두 사람은 서로를 뜨겁게 끌어안았다. 이정재는 손으로 슬쩍 눈가를 훔쳤다. 수상 소감이 이어졌다. “저의 은인이고 선생님이자 아버지인 분에게 상을 받아 더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이정재는 당대 스타였던 배 감독의 ‘젊은 남자’(1994)로 첫 주연을 맡으며 충무로에 입문했다. 인기 TV드라마 ‘모래시계’(1995)로 대중에 존재를 알리기 전이니 배 감독의 선견이 놀랍다.
20년 동안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다 최근 영화 ‘관상’과 ‘암살’로 다시 대중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이정재로선 배 감독과의 해후가 눈시울을 자극할 만했다. 두 사람은 ‘흑수선’(2001)을 마지막으로 이렇다 할 만남을 갖지 못했다. 잇따른 흥행 실패 등으로 배 감독은 대중과 멀어졌고 자신이 빛낸 스타와의 재회도 쉽지 않았다. 배 감독이 지난 6월 어느 전철역에서 철로 추락사고를 당한 뒤 이날 처음으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두 사람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2011년 칸영화제를 찾았던 배우 김윤석은 외국 유명배우의 에피소드를 부러워하며 언급한 적이 있다. 유명배우가 칸을 찾을 때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모습을 포착해 온 한 사진기자를 발견하고선 반가워하며 함께 포즈를 취했다는 사연이었다. 대중의 변덕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만남이라 더 특별한 감정이었으리라. 이정재의 눈물에서 스타의 남모를, 쓰디쓴 고통을 읽었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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