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스타일의 핵심엔 요리"
패션매장 한 켠에 카페 열고 디자이너·셰프 협업 행사하기도
젊은 남성 등 방문 빈도 높이고 독특한 경험으로 브랜드 어필
생활 전면 사로잡는 복합공간으로
“당신이 먹는 것이 바로 당신(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말의 의미가 바뀌고 있다. 영양학적 차원에서 거론되던 ‘신토불이’의 자장에서 벗어나 음식이야말로 당신의 계급적ㆍ사회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라이프스타일 지표임을 저 말은 보여준다. 트렌드의 권좌에 오른 것은 이제 패션이 아니라 음식이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들이 잇달아 매장 내 카페와 레스토랑을 열고 있는 것은 패션마저 음식의 의미망 안으로 포섭되고 있는 트렌드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쇼핑하다 다리가 아프면 쉬라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패션이 아닌 라이프스타일을 팔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의→식→주의 순서로 트렌드가 움직인다는 것은 트렌드 분석 전문가들이 공리처럼 여기는 명제다. ‘잇백’의 시대가 가고 끊임없이 변형되고 확장되는 ‘잇푸드’ 시대가 왔다. 이제 가장 패셔너블한 라이프스타일은 무엇을 입고 들었느냐가 아니라 어디서 무엇을 먹느냐로 규정된다. 삼성패션연구소는 지난달 내놓은 ‘푸드 이즈 뉴 패션(Food is New Fashion)’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패션계 내 음식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며 “음식을 소비하는 즐거움과 가치가 오트 쿠튀르 패션처럼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업그레이드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각광받고 있다”고 분석했다. 음식이야말로 오늘날 가장 핫한 패션 아이템이다. 패션이 팔고자 하는 것은 라이프스타일이며, 라이프스타일의 핵심에 음식이 있다.
닥스 티카페, 디올 스토어에 디올카페
지난달 문을 연 현대백화점 판교점의 닥스 매장 한 켠에는 영국식 티카페가 자리잡고 있다. ‘양복집에 웬 홍찻집?’ 약 4평 규모의 공간에 숍인숍의 형태로 들어선 이 카페에서는 포트넘&메이슨, 트위닝 등 영국 유명 브랜드의 티를 시음하고 구입할 수 있다. 얼그레이, 다즐링 등 판매 중인 홍차가 수십 여종에 이른다. 영국 브랜드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브랜드 마케팅 활동의 일환이다.
다소 생뚱맞다는 생각과 함께 드는 의문. 설마 매출에 영향을 미칠까? LF 닥스남성 BPU 곽준호 과장은 “젊은 남성 고객들의 매장 방문율과 체류시간이 늘어나는 등 티카페 운영의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고 말했다. 패션에 관심이 많고 쇼핑에 적극적인 그루밍족(멋을 아는 독신남)이 증가함에 따라 쇼핑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까지 사로잡는 복합매장으로 진화는 필수적이라는 설명이다. 이제 패션 브랜드는 브랜드가 지닌 라이프스타일 콘셉트를 소비자들에게 어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난 6월 서울 청담동에 국내 첫 단독 부티크를 오픈한 크리스챤 디올의 ‘하우스 오브 디올’은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가인 크리스챤 드 포잠박이 설계한 건물이나 매장보다도 디올카페로 순식간에 힙 플레이스로 떠올랐다. 건물 루프탑에 자리잡은 디올카페는 프랑스의 스타 패스트리 셰프인 피에르 에르메가 운영하는데, 마카롱 초콜릿 아이스크림 케이크뿐 아니라 ‘피에르 에르메 파리’에서만 맛볼 수 있는 스페셜 음료도 판매한다. 에르메의 디저트를 먹어볼 수 있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면서 카페는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뤘고, 아메리카노 1만9,000원, 마카롱 개당 5,000원이라는 ‘사악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명소로 자리잡았다.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패션 스토어라는 개념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시작된 10꼬르소꼬모가 세계 최초로 도입했다. 슬로쇼핑이라는 철학 아래, 예술, 패션, 음악, 디자인, 음식, 문화의 독특한 융합이 있는 다기능 공간을 기획,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콘셉트 스토어 개념을 만들어낸 것. 2008년 청담동에 들어온 10꼬르소꼬모 역시 북숍과 카페, 레스토랑, 카페라운지, 가든카페가 한데 어우러진 ‘꼬모카페’를 두고 있다. 미국 아티스트 크리스 루스가 디자인한 유니크한 공간에 테이블 사이사이 다양한 북 셀렉션이 더해져 단순히 먹는 즐거움이 아닌, 보고 느끼는 즐거움을 선사한다는 취지의 이 공간은 패션매장과 카페가 결합한 국내 최초의 복합공간으로 청담동의 핫 플레이스 역할을 해왔다. 이탈리아의 다양한 메뉴와 한국적인 맛을 새롭게 조화시킨 음식들을 선보인다. 이탈리아산 어란, 한치, 케이퍼로 맛을 낸 보따르가 카펠리니(2만9,000원), 부드러운 솜사탕을 얹은 카페의 시그니처 바닐라 아포가토(1만6,000원) 등이 유명하다. 개당 수백 만원에 달하는 디자이너 의자에 앉아 내부 정원과 분수대를 감상하며 쉴 수 있는 것도 특별한 메리트.
패션+다이닝=‘고메 쿠튀르’의 탄생
자칭 ‘디자인을 선도하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인 W 서울 워커힐 호텔은 아예 패션과 다이닝의 콜라보레이션을 선보이고 있다. 1년에 두 번 패션 디자이너와 호텔 셰프의 협업으로 파인 다이닝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고메 쿠튀르’가 그것. 최신의 패션 트렌드와 고메 트렌드를 함께 선보이는 행사로, W 서울의 스타 셰프 조나단이 디자이너의 색깔과 철학을 음식으로 재탄생시키면, 디자이너는 직접 레스토랑을 자신의 작품으로 꾸며 스타일리시한 다이닝 경험을 선사한다. 지난해 가을 시작된 첫 회에 KYE by 계한희 디자이너, 2회에 ARCHE by 윤춘호 디자이너와 함께 진행한 고메 쿠튀르는 이 달 한 달간 K-패션의 뉴 아이콘으로 불리는 권문수 디자이너와 함께 패셔너블한 미각의 잔치를 벌인다.
불면증을 모티프로 한 권문수 디자이너의 2015 추동복 컬렉션을 주제로, 불면증 완화에 도움이 되는 트립토판과 멜라토닌이 풍부한 식재료로 식탁을 꾸민다. 지중해산 일년초인 아루굴라 주스와 흑미 리조토에 노란 샤프란 크림을 얹어 블랙과 옐로 컬러가 통통 튀면서도 세련되게 조화되는 ‘흑임자 크러스트 광어 구이’ 등을 선보인다. W 서울의 키친 레스토랑에서 진행되며, 1인당 가격은 12만원. 여느 호텔에서는 볼 수 없는 차별화한 메뉴라 독특한 경험을 즐기고자 하는 고객들의 반응이 특히 좋다고.
칼 라거페트가 이끄는 샤넬의 올 추동복 컬렉션은 런웨이를 카페로 꾸며 큰 화제를 모았다. 오프닝과 클로징을 맡은 카라 델레바인과 켄달 제너가 실제 카페에서 만나 시간을 보내듯 회전문을 열고 등장해, 옷을 벗어 걸고 자리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식으로 퍼포먼스형 패션쇼가 진행됐다.
“아날로그적 쇼핑” 푸드가 패션을 이끈다
패션과 푸드의 행복한 만남은 전 세계적 트렌드다. 랄프 로렌이 뉴욕에 오픈한 ‘폴로 바’는 셀러브리티들이 몰려드는 성소가 됐고, 버버리가 런던 리젠트 스트리트에 연 토마스 카페, 아르마니가 밀라노 외 전 세계 주요 도시에 문을 연 디저트 카페 ‘아르마니/돌치’, 구찌가 중국 소비자와의 상호작용 확대를 위해 상하이에 연 ‘1921 구찌 카페’ 등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삼성패션연구소는 보고서에서 “패션업계에서 식음료 컨텐츠는 고객수를 폭발적으로 증가시키는 요소로 떠올랐다”며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패션 리테일 매장에 들어설 경우, 소비자가 매장에 방문해 상품을 구매할 가능성을 높이는 것은 물론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 충성도를 높이는 데도 효과적”이라고 분석했다. 소비자들이 온라인으로 패션 상품을 구매할 수는 있지만, 온라인상에서 친구들을 만날 수는 없는 시대라는 점도 중요하다. 오로지 아날로그로만 가능한 쇼핑은 친구나 가족과 함께 어울려 하는 쇼핑.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레스토랑이나 카페의 도움이 절대적이다. 쇼핑도 잊을 수 없는 삶의 경험이 되게 하려는 것. 그게 패션이 푸드를 입는 이유다.
박선영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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