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주고 받는 재미

입력
2015.09.22 11:24
0 0

추석이 코앞이다. 과수원을 오래 하다 보니 시장에 내는 것 말고 개인적으로 주문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그런 분들이 명절을 맞아 사과를 선물하는 경우가 많아서 오늘까지 택배 작업을 마쳤다. 택배를 보내러 가면 그곳은 거의 전쟁터가 따로 없을 정도로 바쁘다. 통계로 보아도 명절에 오가는 선물이 엄청나다고 한다.

그토록 많은 선물 중에 딱히 명절이라고 우리 집에 오는 건 거의 없다. 물론 거래하는 농약사나 택배회사 같은 데서 직접 선물을 주기도 한다. 비누나 치약, 식용유 따위가 들어 있는 규격화 된 박스를 받으면 고맙지 않을 리야 없지만 그저 심드렁한 것 또한 사실이다. 물건이 흔해져서기도 하겠지만 대개는 내게 별 쓸모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극이 덜한 비누나 유전자조작 콩과 유채 기름을 피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내가 선물을 적게 받으며 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명절이 아니더라도 나는 연중 선물을 받으며 살고 있다. 올해 받은 것들만 생각나는 대로 적어도 꽤 긴 목록이 될 것이다. 쌀이 두 가마, 참깨 서 되, 감자 30㎏, 고구마 20㎏, 고추 20근, 밤 한 말, 마늘 두 접, 녹두 두 되, 셀 수 없을 만큼의 옥수수 등등. 그 밖에 각종 푸성귀들은 목록에 낄 자리도 없겠다.

추석을 일주일 앞둔 20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반여농산물도매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제수용 및 선물용 과일을 구입하고 있다. 뉴시스
추석을 일주일 앞둔 20일 오후 부산 해운대구 반여농산물도매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제수용 및 선물용 과일을 구입하고 있다. 뉴시스

그 모든 선물은 함께 사는 마을의 이웃들에게 받은 것이다. 그렇다고 마을이 얼마나 크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불과 열일곱 가구가 사는 작은 동네다. 논농사를 하는 집들이 많은데 과수원을 하는 내게 두어 말씩 쌀을 선물한 게 따져보니 두 가마나 된다. 아마 저 정도면 한 사람이 일 년 내내 먹을 만한 양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많은 선물을 받은 셈이다.

물론 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는 수확기가 되면 과수원에서 나오는 흠집이 난 복숭아와 사과를 거의 매일 나눈다. 우리 마을 그 누구도 복숭아와 사과를 사먹지 않는다. 그것들은 ‘과수원 집’에서 거저 나오는 것이라는 게 마을의 상식이다. 나로서는 시장에 나가봐야 돈도 되지 않는 것들을 나누는 것뿐인데 마을 사람들은 과일을 흔하게 먹는다는 이유로 그들이 농사지은 것들을 내게 과하게 베푼다. 단순하게 농촌에 사는 재미라고 할 수는 없는데, 실제로 생활하는 데 큰 보탬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맺는 경제적인 관계는 근본적으로 이런 주고받는, 무상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우리 마을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적어도 굶주리거나 헐 벗는 걱정을 하지는 않는다. 갑자기 곤경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십시일반으로 돕기도 하고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일단 구제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농산물이나 생활용품을 주고받는 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교환이나 돈을 요구하지 않는 선물주기가 미약하나마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경험으로 확신하건대 이런 공짜로 주고받는 것은 돈으로 사고파는 것보다 훨씬(백만 배쯤이라고 과장하고 싶어진다) 만족도가 높다. 아니, 행복도라 해야 옳겠다.

여러 해 동안 이런 주고받기를 거듭하면서 나는 묘한 상상을 하게 되었다. 사회 전체에서 전면적으로 이런 주고받기가 이루어지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농산물에서 공산품으로, 들고 다니기가 힘들면 쉽게 주고받을 수 있는 동전이나 지폐까지 무상으로 주고받으면 어떨까? 실은 내 독창적인 상상이 아니라 시장과 돈의 발생을 설명하는 어느 경제학자의 책을 읽으면서 가지를 친 생각이었다.

허황되거나 실현 불가능한 생각 같지만 실은 우리가 처음 작은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 시작된 경제의 단초였고 어쩌면 그렇게 발전해왔을지도 모르는 하나의 길이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이 돈으로 환산되어 가치와 잉여의 창출, 부의 축적 따위가 일반화 된 나쁜 길로 오고 말았지만 말이다. 차오르는 달을 보며 인간의 생존조건이었던 ‘선물 주고받기’를 생각하는 가을밤이다.

최용탁 소설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