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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천고사설] 대동(大同)의 길

입력
2015.09.17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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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말기 친일을 한 사람들 중에는 그 길을 구국의 길로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빼앗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해 부평 군수로 나갔던 전협(全協)도 그런 인물이었다. 매국 단체였던 일진회의 핵심 인물이었던 전협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고 일진회까지 해산시키자 매국에서 독립운동으로 전향했다. 전협의 독립운동이 다른 단체들과 달랐던 점은 황족과 귀족들을 망명시켜 독립운동 진영에 가담케 하려 했던 점이었다.

전협은 1920년 농상공부대신과 중추원 의장(1900)을 역임한 김가진(金嘉鎭ㆍ1846~1922)을 상해로 망명시키는 데 성공해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협은 내친 김에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왕(義王ㆍ의친왕) 이강(李堈)을 망명시키기 위해 압록강 건너 안동(安東ㆍ현 단동)까지 갔다가 일제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 받았다. 일제의 독립운동가 처리 방식이 있었다. 가혹한 고문 등으로 거의 죽게 만들어서 죽기 직전 석방시키는 것인데, 전협도 이런 유형에 포함된다. 그는 1927년 11월 9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이틀만에 순국했다. 그런데 전협이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해 만든 단체가 대동단(大同團)이다. ‘대동’에는 민족이 하나로 단결해서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자는 뜻도 있지만 원뜻은 동양 유학사상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조선 후기 소론의 거두였던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는 ‘혼정편록(混定編錄)’에서 “정여립(鄭汝立)은 전주ㆍ태인ㆍ금구(金溝) 등 인근 고을의 여러 무사(武士)와 공사(公私) 천인(賤人)들까지 상하를 통해서 계를 만들어 대동계(大同契)라고 이름 지었다”고 전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의 선비 정여립이 벼슬을 그만둔 후 전라도 진안(鎭安) 죽도(竹島)로 낙향해 만든 조직의 이름도 ‘대동계’였다는 것이다. 대동계에 양반들뿐만 아니라 공사 천인들까지 포함되었다는 것은 조선의 신분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정여립이 역모로 몰려 죽게 된 데는 이런 신분해방 사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대동사회’라는 이상적 사회를 동양 유학사회에 제시한 인물은 공자였다.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따르면 공자는 지금의 산동반도에 있던 노(魯)나라에서 국가 제사에 참여하고 난 후 성문 위에서 쉬면서 탄식했다. 제자 자유(子游)가 까닭을 묻자 공자는 “대도(大道)가 행해졌던 때는 천하가 공공의 것”, 즉 ‘천하위공(天下爲公)’이었다고 말했다. 공자가 말하는 대도(大道), 즉 큰 도가 행해졌던 때는 요ㆍ순(堯ㆍ舜) 임금 때를 뜻하는데, 이때는 천하가 임금이나 소수 귀족의 소유가 아니라 모든 백성의 소유였다는 뜻이다.

공자는 대동사회의 구체적 모습에 대해 “노인들은 편안하게 일생을 마칠 수 있고, 젊은이는 다 직업이 있고, 여자는 다 시집갈 자리가 있고, 어린이는 잘 자라날 수 있고, 과부ㆍ홀아비ㆍ병든 자를 모두 사회가 봉양한다”고 말했다. 공자는 또 부유하다고 해서 “재물을 땅에 버리는 자는 싫어했지만 반드시 자기를 위해 창고에 쌓아 두지는 않았고” 신분이 귀하다고 해서 “몸소 일하지 않는 자는 미워했지만 반드시 자기를 위해서만 일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재물을 사회와 나누고 직접 노동하는 것을 높였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가 대동사회라는 것이다.

대동사회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천하가 개인이나 소수의 것이 아니라 사회구성원 모두의 것이라는 ‘천하위공’ 사상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데, 이는 결국 사회의 약자를 우선하는 사회를 뜻한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경기도에 시범실시했다가 전국으로 확대된 세법의 이름이 대동법(大同法)인 것은 약자를 위하는 세법이기 때문이다.

대동법은 국가ㆍ왕실에 바치는 각종 진상품(進上品)인 공납(貢納)을 쌀로 통일해서 내는 세법을 뜻하는데, 임란 때 재상 류성룡(柳成龍)이 작미법(作米法)이란 이름으로 시행했다가 양반 사대부의 반발로 폐기되었던 법이었다. 과거의 세법은 대부호나 가난한 소작농이나 같은 액수가 부과되었지만 대동법(작미법)은 부과 단위를 농지 면적의 많고 적음으로 바꿈으로써 대토지 소유자는 많이 내고, 토지가 없는 빈자는 부과를 면제했다. 그 시행관청을 ‘백성들에게 널리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란 뜻의 ‘선혜청(宣惠廳)’이라고 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이 대동법 때문에 효종ㆍ현종 연간의 대기근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백성들의 생활 향상에 큰 영향을 끼쳤던 법이었다.

2010년 이후 올해 7월까지 각종 복지서비스가 중단된 사람이나 급여가 감소된 사람이 218만명에 달한다는 소식이다. 급여가 늘어난 사람은 78만명뿐이라니 거꾸로 가는 복지정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동법에서 선조들이 말해주는 것은 부자가 많이 내는 조세정책이 복지사회의 초석이란 점이다. 지난 정권에서 인하한 법인세부터 정상화하는 것이 국민 다수가 행복한 대동사회로 가는 길이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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