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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XX야!” 비난과 욕설에 말을 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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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XX야!” 비난과 욕설에 말을 잃다

입력
2015.09.0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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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에도 입사 직후 수습 기간이 있듯 심판들에게도 공식 경기에 나서기 전 '실습 기간'이 있다. 기자를 포함한 2006년 하계 신인 심판들은 강습회 기간 동안 교육 받은 내용을 바탕으로 실전 감각을 익히기 위해 ‘2006 대교 눈높이컵 전국 초등학교 축구대회’가 열린 경북 경주로 향했다.

2006년 8월 14일부터 경주 일대에서 벌어진 이 대회에서 신인 심판들은 조별예선이 펼쳐진 3박 4일간 저학년부(1~3학년)의 부심과 대기심으로 투입돼 실전을 경험했다.

신인 심판들은 전·후반 20분씩 40분간 펼쳐지는 경기에 하루 3~4차례씩 배정됐다. 고학년 선수들에 비해 보폭이 크지 않아 경기 전개가 상대적으로 느린 편이었지만 처음으로 실전에서 부심기를 잡은 심판들은 매 순간순간 진땀을 뺐다.

뜨거운 날씨 속에서 바짝 긴장한 채 이리저리 뛰어다닌 풋내기 심판들은 하루 일정이 끝날 무렵이면 파김치가 됐다. 그러나 심판들을 더욱 지치게 만든 건 ‘정신적 충격’이었다.

2006 대교 눈높이컵 전국 초등학교 축구대회 당시. 오른쪽이 필자다.
2006 대교 눈높이컵 전국 초등학교 축구대회 당시. 오른쪽이 필자다.

지도자와 학부모, 여기에 일부 초등학생 선수들까지 거친 말로 항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경기를 지켜보던 어린 선수들도 팀에 불리한 판정이 내려질 때마다 “심판 돈 먹었네~”“눈 감고 심판 보냐!”고 소리치며 비난부터 날리니, 기자를 포함한 많은 신인 심판들은 아연실색 할 수밖에 없었다.

첫 날 일정을 마치고 심판들이 숙소에 모여 그 날 있었던 일들을 풀어 놓다 보니 많은 에피소드가 쏟아졌다. 한 심판은 경기 중 관중석에서 ‘심판’이란 단어에 욕설 비슷한 것을 붙여 내던진 어떤 선수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리 순화해도 “심판 XX야”로 들려 경기를 중단시키고 지도자에 주의를 당부했는데, 오히려 지도자가 ‘우리 애가 틀린 말 했느냐’는 식으로 항의했다는 것이다. 심판들은 상당한 박탈감을 느꼈다.

프로축구에서도 ‘논란의 장면’들이 생겨나듯 그 곳에서도 심판들의 미숙한 판정이 있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축구의 즐거움을 알아가야 할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 앞에서 거친 말로 심판 탓부터 하는 젊은 지도자들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더 슬픈 건 휘슬이 울리면 반사적으로 항의부터 하는 성인 지도자와 선수들 모습이 오버랩 됐다는 점이다. 어릴 때부터 길들여진 습관 탓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사막 같았다. 초등학교 무대에서마저 심판들은 ‘동업자’가 아닌 듯했다.

그러나 3박 4일 일정의 마지막 날, 부심으로 나선 경기를 마친 후 그간의 고단함을 씻어주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심판들도 경기가 끝나면 더운 날씨 속 체력 소모와 긴장 탓에 시원한 생수를 찾는데, 그 날 따라 심판석의 아이스박스는 텅 비어있었다.

이 때 경기를 마친 두 명의 초등학생이 심판 대기석까지 쭈뼛쭈뼛 찾아와 수줍게 물을 내려놓고 갔다. 경남의 한 초등학교였는데, 토너먼트였던 그 경기에서 패한 후 짐을 정리하다 심판들이 빈 아이스박스를 들추는 모습을 본 모양이다.

아이들이 내준 물을 들이켜니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를 만난 것 같았다. 3박 4일간 느꼈던 정신적 충격까지 씻어내는 청량감이 가슴 속을 적셨다. 승패에 관계없이 심판을 배려한 두 아이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커 보였다.

‘상대와 동료 선수, 심판과 임원, 관중을 존중한다(Respect opponents, teammates, referees, officials and spectators)’

대한축구협회 축구인 헌장 4조다. 축구뿐 아니라 모든 스포츠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마음가짐이지만 성적 지상주의의 그늘에 가장 먼저 가려지는 가치이기도 하다. 비록 두 아이의 팀은 조별예선 탈락이란 성적표를 받았지만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이들은 분명 우승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깨우쳐가고 있었다.

김형준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대한축구협회 3급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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