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난민 거처·교회·현미경·깁스… 종이의 무한 변신

입력
2015.08.30 14:30
0 0

현지서 쉽게 구할 수 있고 가볍고 설계따라 원하는 강도 충족

사용후 분해돼 환경에 부담 안돼… 우간다선 파피루스 생리대 주재료

日 시게루, 난민 위한 종이 건축 명성… 재난 현장 휴대용 깁스까지 개발

천연생리대 외피 만드는 모습. 홍성욱 교수 제공
천연생리대 외피 만드는 모습. 홍성욱 교수 제공

2014년 초에 우간다 북쪽에 위치한 루이히라 마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미국 컬럼비아대 지구연구소 소장인 제프리 삭스 교수가 새천년개발목표(MDGs) 달성을 위한 시범사업으로 제안한 ‘밀레니엄 빌리지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었다(본보 6월 1일자 22면 참조). 우간다 수도인 캄팔라에서 차를 타고 적도를 지나서 루이히라 마을을 향해 가는 길가에는 광대한 파피루스밭이 펼쳐져 있었다. 이를 바라보면서 파피루스를 사용해서 적정기술 제품을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종이를 이용한 천연 생리대

캄팔라에는 국립대인 마케레레대학교가 있다. 마케레레대의 원래 명칭은 동아프리카대학교로 여기서 케냐의 나이로비대와 탄자니아 다레살렘대가 분리돼 나왔다. 밀튼 오보테 전 우간다 대통령, 줄리어스 나이에레 고 탄자니아 대통령, 므와이 키바키 전 케냐 대통령 등이 이 대학 출신이다. 마케레레대에는 기술개발이전센터가 있는데, 이 센터의 소장인 무사아지 박사는 20년 이상 적정기술 분야 연구경력을 자랑하는 전문가다(본보 8월 10일자 21면 참조). 기술개발이전센터 건물도 센터에서 직접 만든 흙 벽돌을 이용해서 10여년 전에 건축되었다. 무사아지 박사는 또한 ‘내일을 위한 기술’이란 적정기술 단체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생산하는 제품 중 가장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MakaPads라는 브랜드 이름의 천연 생리대였다. 아프리카에서는 생리대를 구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여성들이 매우 큰 곤란을 겪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국제 개발협력단체가 천을 이용한 생리대 제조 키트 등을 보급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무사아지 박사가 운영하는 작업장에서는 파피루스와 신문지 등을 사용해서 천연 생리대를 제조하고 있었다. 필자는 운이 좋게도 그가 운영하는 작업장 중 한 곳을 직접 방문할 수 있었다. 제조 공정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파피루스 말린 것과 신문지를 잘게 썬 것을 물에 불린 후에 틀에 부어 말리면, 생리대에 사용할 흡수재가 완성된다. 이제 말린 흡수재를 크기에 맞게 자른 후 미리 만들어둔 패드 속에 집어 넣는다. 패드는 한 쪽은 통기가 잘 되고, 다른 한쪽은 밀폐돼 있어야 한다. 패드를 포장한 후에 접착 테이프를 붙이고, 오존 램프를 이용해서 살균하면 천연 생리대가 완성된다. 가격은 10개짜리 한 팩에 0.7달러이다. 필자가 무사아지 박사에게 어려운 점이 없는지 물어 보았을 때, 그는 판로 개척이 가장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우간다 시민들의 인식 부족으로 주요 판매처는 유엔난민기구(UNHCR)와 같은 유엔 산하단체로 제한됐다. 하지만 이 작업장을 통해 약 300명의 고용 창출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과, 주위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파피루스와 종이를 이용해서 여성에게 필요한 제품을 제작한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1993년 발간된 ‘적정기술 소스북’이라는 책에 언급된 적정기술의 11가지 원칙 중에는 “가능하면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사용하라”는 원칙도 포함돼 있다. 종이는 대부분의 개발도상국 현지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재료다. 또한 플라스틱 등과는 달리 쉽게 분해되므로 제품 사용 후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는다.

반 시게루가 종이 튜브를 이용해서 2001년에 인도에 건축한 셸터의 모습. 미 하얏트 재단 제공
반 시게루가 종이 튜브를 이용해서 2001년에 인도에 건축한 셸터의 모습. 미 하얏트 재단 제공

종이로 지은 난민 주거지

1957년 태어난 일본인 디자이너인 반 시게루는 종이 튜브를 이용해서 난민 주거지를 건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4년 르완다 내전 때 유엔난민기구와 협력해서 종이를 사용한 피난민 셸터를 만들면서부터다. 자연재해 전쟁 대학살 등이 일어나면 대량의 난민들이 발생한다. 이들을 수용할 다수의 난민 셸터를 저렴한 비용으로 조속히 건설해야 하는데, 반 시게루는 종이 튜브를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1995년에 자원건축가네트워크라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하고, 세계 곳곳의 재난 지역을 돌며 종이로 난민 셸터를 지었다. 1999년 터키, 2001년 인도 구자라트, 2004년 스리랑카, 2008년 중국 쓰촨에 지진이 발생했을 때, 그리고 2013년 발생한 태풍 하이얀 때도 종이 난민 쉘터로 주민들을 위로했다. 특히 2013년에는 기존의 건축기법을 대폭 개량해서 매우 빠르고 간편하게 셸터를 지었다. 먼저 플라스틱으로 된 맥주병 박스에 모래 주머니를 채워서 기초를 만들고, 코코넛으로 만든 합판을 그 위에 올렸다. 이 위에 종이튜브로 된 구조물을 올리고, 지붕은 야자수 잎을 덮었다.

그는 또 1995년 일본 고베 대지진이 발생하자 이재민들이 체육관과 같은 곳에서 사생활을 침해받지 않으면서 편히 지낼 수 있도록 파티션을 나눈 임시 거처를 설계하였으며, 지진으로 불타 없어진 타카토리 교회를 대신할 종이 교회를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단 5주 만에 완성하였다. 2011년 동일본 지진 때는 임시거처의 디자인이 조금 더 정교해지고 세련되어졌다. 또한 2011년 뉴질랜드의 캔터베리 지진 때는 크라이스트 처치에 있는 무너진 대성당을 대신할 종이 성당을 건축하였는데 이 성당은 미관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

시게루는 이외에도 2006년 서울 올림픽공원에 페이퍼테이너 뮤지엄을, 2010년에는 프랑스의 퐁피두 센터 분관을 종이 등으로 건축하기도 하였다. 이런 공로로 그는 2014년 건축예술을 통하여 인류와 건축환경에 일관적이고 중요한 공헌을 한 생존 건축가에게 주는, 일명 건축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했다. 시게루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 7번째 일본인 건축가다.

스탠퍼드에서 개발한 종이 현미경인 폴드 스코프와 사용 모습. 폴드스코프 홈페이지
스탠퍼드에서 개발한 종이 현미경인 폴드 스코프와 사용 모습. 폴드스코프 홈페이지

유치원생도 만들 수 있는 종이 현미경

필자는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아쿠아 팀과 함께 2012~2013년에 탄자니아 키왈라니 지역에서 정수기의 일종인 바이오샌드필터를 보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현지에 있는 SON International이라는 미국 단체의 지점에서 바이오샌드필터를 구입하고 현지 주민을 대상으로 위생 및 필터 사용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나누고 싶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교육 전 SON International에서 온 엔지니어는 자신의 손바닥에 반짝이는 가루를 묻힌 상태에서 주민들과 돌아가면서 악수를 했다. 강의 중간에 그는 주민들에게 자신의 손바닥을 보라고 했고 주민들은 손바닥에 반짝이는 가루가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 그 엔지니어는 이처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많은 세균들이 우리 손에 있으므로 비누를 사용해서 자주 손을 씻어야 하며, 물에도 많은 세균이 있을 수 있으므로 정수기를 사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많은 주민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하였다.

만약 주민들이 손바닥에 있는 세균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교육 효과는 더 컸을 것이다. 미국 스탠포드대 마누 프라카시 교수팀은 종이로 만든 현미경(일명 폴드스코프)을 제작해서 보급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현미경 제작 방법은 아주 간단해서 유치원생도 쉽게 만들 수 있는데, 종이로 된 기판에서 부품들을 떼어내서 조립하기만 하면 된다. 종이 현미경의 무게는 8.8g이고, 배율은 2,000배로 가격은 렌즈를 포함해서 1달러가 채 되지 않는다. 작동 방법도 매우 간단해서 눈을 눈썹이 렌즈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대고 관찰하기만 하면 된다. 만약 초점이 맞지 않으면 두 손으로 종이 현미경을 잡고, 양쪽 검지와 중지로 슬라이드를 상하좌우로 밀면서 초점을 맞춘다. 종이 현미경은 여러 버전이 개발되어 있으며, 밝은 장소는 물론 어두운 곳에서도 관찰할 수 있고, 형광 현미경, 편광 현미경, 그리고 투사 현미경도 개발되어 있다.

프라카시 교수팀은 현재 종이 현미경 1만개를 제작해 전 세계에 보급하고, 사용 경험과 제품에 대한 피드백을 공유해서 성능을 함께 개선해 나가는 ‘현미경 1만개 사인업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는 앞으로 종이 현미경을 1년에 10억개 이상 제작해 개도국에 보급할 계획이라고 한다. 종이 현미경은 위생 교육에 사용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 과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고, 살아있는 과학지식을 쌓을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개도국 학생들의 역량 개발로 연결돼 개도국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예상된다.

재난현장에서 긴요한 종이 깁스

캘리포니아예술대에 재학 중인 니콜라스 리들은 2007년 5월 중국 쓰촨성 지진 현장을 보도한 TV 뉴스를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일손과 의료기기 부족으로 재난자가 그대로 방치되고 있는 모습이 보도되었던 것이다. 리들은 재난 현장에서 손쉽게 사용 가능한 의료 기구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과거 자신이 사고를 당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휴대용 종이 깁스 제작을 위한 ‘프리오 페이퍼 캐스트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가볍고 조립이 쉬운 휴대용 깁스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프리오 종이 깁스는 격자식 구조를 이용해서 강도를 높였고, 특별한 매뉴얼 없이도 누구나 손쉽게 조립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격자식 구조로 되어 있으므로 지그재그로 엇갈려 접으면 부피를 줄일 수 있고, 운반과 보관도 용이하다. 리들은 이 프로젝트로 2009년 제임스 다이슨 어워드 학생 부문 최고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에서도 종이를 사용한 다양한 적정기술 제품들을 개발해 개도국에 보급한 경험이 있다. 올 초 인도 첸나이를 방문한 현대하이스코 적정기술 봉사단원들은 현지 아이들이 책상이 없어서 방바닥에 엎드려서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종이 찰흙 또는 카드보드를 이용한 조립식 간이 책상을 디자인해서 현지에 보급하였다. 또한 계란을 담아 두는 종이 틀을 활용해 아이들이 간편하게 가지고 놀 수 있는 레고형 종이 블록을 제작해 보급했다. 한편 2014년에 에티오피아에서 폐휴대폰을 이용한 영사기를 보급한 햇빛 영화관 프로젝트 팀도 영사기 본체를 나무 대신 카드보드 박스로 제작했다.

종이는 현지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고, 가벼우며, 가격이 저렴하고, 적절하게 설계하면 원하는 강도를 가질 수도 있고, 사용 후 쉽게 분해되는 좋은 적정기술재료이다. 물론 물에 약하므로 물과 접촉할 가능성이 있는 제품에 사용할 때에는 주의해야 한다. 종이를 활용한 창의적인 적정기술 제품들이 앞으로 더 많이 개발돼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기를 기대해 본다.

홍성욱·국립 한밭대 적정기술연구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