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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파고든 차별… 너도나도 벌레가 되었다

입력
2015.08.1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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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뇌충·의전충·일베충… 민폐 끼치는 엄마는 '맘충'

기득권 지키기 위한 포장술, 사회적 약자에 비난 화살

"갈수록 자극적인 단어 찾아… 관용 상실한 사회, 규제 필요"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첫 문장이 대한민국에서 재연됐다. 의전충 로퀴벌레 지균충 설명충 토익충까지, 바야흐로 벌레의 시대다. 사회적 약자를 비롯해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에게는 벌레(蟲)의 낙인을 찍어 거리낌없이 조롱하고 비하하는 차별과 혐오의 언어가 사회에 횡행하고 있다.

● 의사ㆍ변호사 등 전문가 집단에서도 번져

‘벌레 충(蟲)’이 처음 쓰이기 시작한 시점은 2000년 대 초반이다. 뇌가 없는 벌레라는 의미로 특정 연예인을 비하하여 쓴 데서 비롯된 ‘무뇌충’이란 단어는 2002년 국립국어원의 신어 자료집에 수록될 정도로 널리 사용됐다. 점차 사용빈도가 줄어 사라져가던 이 신어는 의학전문대학원(의전원)의 도입으로 부활했다. 의과대학의 학생들이나 의사들이 의전원 학생들을 ‘의전충’(의학전문대학원+벌레 충)이라 비하한 것이다.

2009년에 첫 입학생을 받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었다. 로스쿨 학생들은 ‘로퀴벌레’(로스쿨+바퀴벌레)나 ‘법퀴’(법학전문대학원+바퀴벌레)라고 불린다. 이 같은 차별의 기저에는 출신성분에 따른 구별짓기가 있다. ‘의대, 법대 졸업장 없이도 의사,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는 의도로 ‘좋은 직업’의 진입장벽 철폐를 위해 도입됐던 전문대학원제도가 오히려 차별을 부추긴 셈이다.

전문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차별은 계속된다. 전문대학원 출신들은 입사나 입사 후 승진 등에서 불이익을 받았다고 호소한다. 서울소재의 로스쿨을 졸업하고 손꼽히는 대형 로펌에 취업했던 권모(33)는 “출근 첫날부터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다”고 털어놓았다. 사법고시 출신 변호사들과 권씨를 비롯한 로스쿨 출신 변호사들은 연봉부터 차이가 났고 함께 식사를 하는 일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이혼사건이나 가사사건처럼 사건 배당도 수임료가 적거나 덜 중요한 사건들을 맡다 보니 실력을 키우기도 어려웠고 실적도 나지 않았다”는 권씨는 눈칫밥에 결국 몇 해를 버티지 못하고 로펌을 그만뒀다. 의전원 졸업반인 김모(32)씨도 “대형 병원들 중에 의전원 출신을 꺼리거나 과를 배정할 때 인기 과에서 제외시키기로 유명한 곳들이 있다”며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봤자 의사 세계에서의 서열은 ‘벌레’수준이라 생각에 씁쓸해진다”고 자조했다.

● 일상 속으로 들어온 벌레들

차별의 의미로 쓰였던 벌레의 용법은 점차 다양한 형태로 일상 속으로 파고들었다. 논란이 되는 보수 사이트 일간베스트 이용자들에 대한 혐오의 표시로 벌레를 의미하는 충(蟲)을 붙여 ‘일베충’으로 부른데 이어, 다소 과한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도 벌레라며 거부감 없이 부르는 것이 유행어로 자리잡았다. 일부 커뮤니티 사이에서 비난과 조롱의 의미였던 단어들이 일상 생활의 영역으로 내려오면서 혐오가 옅어진 은어로 문제의식 없이 널리 통용되는 것이다.

최근에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맘충’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해 논란이 됐다. 공공장소에서 아이를 제대로 돌보지 못해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 엄마들을 영어단어인 맘(Mom)에 벌레 충 자를 붙여 폄하하는 것으로, 어머니를 벌레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큰 반발을 불렀다.

주부인 김성연(33)씨는 “물론 자기 자식만 알고 남들을 신경 쓰지 않는 엄마들에게 문제가 많은 건 사실”이라면서도 “이런 표현들이 아이를 데리고 있는 엄마를 비롯해 배려가 필요한 사람들을 약자가 아닌 진상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다”고 전했다.

맘충 뿐 아니라 설명충(지나치게 길게 설명하는 사람) 진지충(모든 사안에 대해 진지한 사람) 페북충(모든 일상을 일일이 SNS에 게시물로 올리는 사람) 등 큰 잘못이 아니더라도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도 모두 벌레취급을 당한다. 타인뿐 아니라 스스로를 토익충, 출근충이라 부르는 자조적인 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토익공부나 출근처럼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타의에 의해 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무력한 벌레에 빗댄 표현이다.

● 자조적인 공격성 드러내는 청년들

청년들은 왜 하필 벌레가 됐을까. 전문가들은 ‘불안감의 표현’이라고 설명한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실험용 쥐들을 상자에 몰아넣고 음식을 주지 않는 스트레스 상황을 만들면 서로가 서로를 공격하는 현상이 나타난다”며 “지금 한국이 그런 상황이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헬조선’(Hellㆍ지옥+조선), 즉 한국사회가 지옥처럼 살기 어렵다는 신조어가 공감을 얻을 정도로 위기에 몰린 청년들이 자조적인 공격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특히 교양 있는 집단으로 자부하는 의사와 변호사 집단 내에서의 차별은 밥그릇 싸움이 본질이라는 것이다. 윤 교수는 “결국 기저에는 자신들의 독점적인 지위가 약화될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있다”며 “로스쿨이나 의전원의 계층 차별적 구조에 대한 지적은 기득권 지키기의 포장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전문가 집단과 비슷한 종류의 차별이 나타난 곳이 서울대학교라는 점도 이 주장을 뒷받침한다. 서울대 학생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의 일부 이용자들은 농어촌 전형이 포함되는 기회균형선발전형으로 들어온 학생들을 ‘기균충’이라 부른다. 지역균형선발을 비하한 ‘지균충’이란 말도 나왔다.

문제는 청년들의 공격이 사회적 약자, 즉 자신보다 약한 대상에게만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표현도 있듯이, ‘충’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 대한 비하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극심한 취업난과 높은 자살률 등 개인이 차지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이 줄어든 상황에서 사회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주변인들, 특히 소수자에 대한 배려나 인권의식의 향상으로 기존보다 나은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들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게 된 것이다.

정덕현 평론가는 “이런 단어들은 짧으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앞으로 벌레뿐 아니라 더욱 강한 표현이 나올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과거 쓸모 없는 사람을 의미하는‘폐인’이 지금의 ‘벌레 충’과 비슷한 용법으로 쓰였듯이 단어가 주는 감각이 무뎌지면 이보다 더 자극적인 단어를 찾게 된다는 설명이다. 이미 벌레라는 단어 역시 무분별하게 일상 속에서 쓰이고 있는 만큼 이후 이보다 더 차별적인 혐오 표현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대해 윤인진 교수는“널리, 또 가볍게 쓰이는 표현이라고 해서 그 안에 담긴 혐오와 차별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며 “규제나 제도개선을 통해서라도 관용을 상실한 한국사회에 제동을 걸어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전혼잎기자 hoi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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