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주의 영국 직할식민지 시절, 그러니까 여왕이 주지사를 임명하고 의회(council, 상원)를 구성하던 시절. 하원 격인 어셈블리(assembly)는 선출직이었지만 주지사가 언제든 해산할 수 있는 조직이었고, 하원이 만드는 법률과 조례는 상위법인 영국(잉글랜드) 법에 부합해야 했다. 윌리엄 코스비(William Cosby)가 뉴욕 주지사로 부임한 게 그 무렵인 1731년 8월이었다. 그는 식민지에까지 소문이 자자했던 ‘탐관오리’였다.
코스비의 첫 ‘진상짓’은 임명되고 부임하기까지 약 반년 간의 임금을 내놓으라는 거였다. 하원은 그 요구를 수락하는 대신 조건을 걸었다. 그 기간 동안 그가 다른 일로 번 돈은 반납하라는 거였다. 그 경우 코스비는 당시로선 거금인 4,000파운드를 오히려 내놔야 할 처지였다. 코스비는 소송을 제기했고, 유리한 판결을 받기 위해 수석 재판관을 교체했고, 유일한 신문이던 ‘뉴욕 가제트’편집장에 심복을 앉혔다.
식민지 정치인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 수단이 새로운 신문을 만드는 거였다. 그게 1733년 11월 5일 첫 호를 낸 주간지 ‘뉴욕 위클리 저널(New York Weekly Journalㆍ사진)’이었고, 발행인은 독일서 이민 온 존 피터 젱거(John Peter Zenger,1697~1746)였다.
‘저널’의 논조가 어땠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익명으로 연재된 ‘카토의 편지’란 제목의 칼럼이 특히 신랄했다고 한다. 코스비는 ‘선동(seditious libel)’ 혐의로 34년 1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저널의 폐간을 노렸지만 대배심에서 좌절한다. 그러자 11월 법원의 체포영장으로 젱거를 구금해버린다.
지금으로부터 280년 전인 1735년 오늘(8월 4일) 뉴욕 시청 메인홀에서 재판이 열렸다. ‘정부 비판= 선동’이던 시절이었다. 젱거는 명백히 불리했다. 검찰의 논고 역시 젱거가 ‘선동성 기사’를 게재한 사실 입증에 집중됐다. 젱거를 변호한 앤드루 해밀턴(Andrew Hamilton)이 쥔 방패는 당시로선 생경했던 ‘언론 자유’였다.
“권력은 거대한 강물과 같다. 잘 통제되면 아름답고 유용하지만, 범람하면 파괴와 황량함을 남긴다.(…) 부당함에 불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모든 자유민의 권리다. 자유의 상실은 죽음보다 못하다.”
배심원단은 무죄를 평결했다. 자유를 향한 인류의 새 길 하나가 그렇게 열렸다.
식민지 법에 대한 미국 시민들의 광범위한 저항이 시작된 건 1760년대 중반 이후였고, 독립전쟁(1775~83)을 거쳐 ‘권리장전’이 만들어진 건 1791년이었다. 수정헌법으로 불리는 권리장전 제1조가 종교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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