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분담금 요구가 읍소로… 또 日에 '을' 신세 된 신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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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분담금 요구가 읍소로… 또 日에 '을' 신세 된 신군부

입력
2015.07.0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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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시작한 '안보경협', 동북아 안정 원한 미국도 한국 지지

신군부 "40억달러라도…" 매달려, 지원 얻어냈지만 해석은 제각각

日 끝까지 안보협력 명분 동의 안 해, "신군부 새 나라 만들기에 기여"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3년 1월 11일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와 건배하고 있다. 양측은 이때 40억 달러에 달하는 경제협력에 합의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은 국가예산의 35%를 국방 분야에 쓰고 있다. 이는 한국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진영의 여러 국가들, 그 중에서도 일본을 위해서다. 더군다나 박정희 대통령이 돌아가신 후 한국은 여러 곤란한 상황을 맞고 있다. 이때 부유한 이웃나라로서 역사적으로도 인연이 깊은 일본에 과감한 방위ㆍ경제 협력을 부탁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현행 일본의 한국에 대한 협력 금액을 10배로 늘려 연간 20억달러, 이를 향후 5년간 총 100억달러를 제공해 달라.” 전두환 정권이 막 들어선 1981년 4월23일 노신영 외무부장관은 일주일 후 이임 예정이던 스노베 료조(須之部量三) 주한 일본대사를 갑자기 불러 이렇게 사실상 ‘통보’했다. 한국이 대규모 군사력을 유지해 일본을 지켜주고 있으니 일본은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이른바 ‘안보 경협론’을 불쑥 제기한 것이다. 이로써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로 결론이 난 1965년 청구권 협정에 이은 대규모 경제협력 논쟁이 한일 간에 불이 붙었다.

“일국의 외무부장관이 갑자기 주재국 대사를 불러 100억달러를 내놔라, 그것도 국방예산을 분담하라는 명목으로 윽박지르다니……한국 정부 미친 것 아닌가.” 서울에서 날아온 급전을 접한 기우치 아키타네(木內昭胤) 일본 외무성 아시아국장은 격앙되어 소리를 질렀다.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 당시 북동아시아 과장(현 일본국제교류기금 고문)의 회고이다.

더욱이 당시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내각은 1979년 12·12 군사쿠데타에 이어 19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한 후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일본측은 1981년 3월 전두환 대통령 취임식에 이토 마사요시(伊東正義) 외상을 파견했지만, 이토는 ‘북한 위협’을 강조하며 쿠데타의 정당성을 호도하는 한국측 주장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특히 당시 일본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이른바 ‘5·17 내란음모사건’으로 체포된 김대중에 국가반역죄를 적용해 사형선고를 내린 데 이어 그 판결문조차 공개하지 않자 한국에 대한 여론이 극도로 악화돼 있었다. 이런 와중에 한국측이 대규모 경협을 안보를 빌미로 요구하다니 일본측은 ‘주제넘고 당돌한’ 신군부에 당혹감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 신군부 정권에게 이런 대일 요구는 거의 확신에 찬 행동이었다. “이들은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반면, 오히려 반일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고 특히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맹렬한 반대운동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의 한일관계를 ‘검은’ 정경유착으로 점철된 부패의 온상이라고 간주, 반드시 청산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의 성격을 분석한 일본외교문서는 한국의 신군부 지도층을 한일관계의 ‘신세대’라고 부르며 이렇게 평가했다. 실제 허문도를 비롯한 전두환 정권의 실세들은 과거처럼 정(情)이나 의리를 내세우며 읍소하기는커녕 마치 당연한 것을 요구해 받아내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천황 주최 공식 만찬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히로히또 일황이 양국의 우의와 발전을 위해 축배를 들고 있다.

공로명 당시 외무차관보가 1981년 8월 일본측에 밝힌 경협 요구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은 국방비 부담이 과대하다. 둘째, 새롭게 경제5개년계획을 추진할 예정인데 군사비 부담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 셋째, 그때까지 거의 200억달러나 쌓인 대일 무역적자를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뒤집어 보면 일본은 안전보장의 측면에서 ‘무임승차’를 해오면서 한국과의 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챙겨온 만큼, 한국이 군사비 부담을 줄여 경제발전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돈을 내놔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측 분석에 따르면 1981년 5월 한국 정부가 수정 발표한 제5차 경제사회발전5개년계획을 완수하는 데는 추가적인 대규모 외자 도입이 전혀 필요치 않았다. 요컨대 한국측의 주장은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이 국내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기획한 정치경제적 요구였던 셈이다.

전두환 정권의 대일 요구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격화된 신(新)냉전과 맞물리면서 미국으로부터도 측면 지원을 받았다. 1981년 2월 대통령 당선자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한 전두환은 막 대통령에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과의 회담에서 한국이 태평양에서 미국 방위의 방호벽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선 역할분담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선 일본이 한국에 거액의 원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레이건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유지기 위해선 무엇보다 안전보장 체제의 구축이 중요하다고 말해 전두환의 구상을 사실상 지지했다. 이를 토대로 전두환 정권은 안보 분담금을 내놓으라고 일본측에 들이댄 것이다.

그러나 역대 일본의 자민당 정권 중에서 리버럴한 축에 속했던 스즈키 정권은 한국측이 내세운 ‘안보 경협’의 논리를 전혀 수용하지 않았다. “일본은 주일미군의 주둔비용을 부담하는 형식으로 미군을 지원하고 있고 이는 한국 방위에도 도움을 준다. 다시 말하면 한국과 일본은 미군을 매개로 공동으로 동북아시아의 안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셈인데, 일본이 일방적으로 한국으로부터 안보 혜택을 받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당시 작성된 일본외교문서는 이렇게 말하면서, 더욱이 한국에 대한 경제협력을 안보의 논리로 포장하는 것은 일본의 헌법정신, 즉 전수방위(專守防衛)에도 반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일본측으로선 미국이 후원하는 전두환 정권의 요구를 마냥 무시해 한일관계를 파탄 낼 수도 없었다. 신군부의 쿠데타를 계기로 박정희 정권 시절 한일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했던 정치적 인맥마저 완전히 단절된 터였다.

일본측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언제까지나 당당할 것 같았던 전두환 정권이 먼저 달아올랐다. 한국 측은 1981년 8월20, 21일 도쿄에서 열린 외무장관회담을 통해 당초의 100억달러보다 40억달러 삭감된 60억달러의 차관 공여를 공식적으로 요청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일본측은 수용하지 않았다. 소노다 스나오(園田直) 일본 외상은 금액에 대해선 가타부타 언급하지 않은 채 먼저 자금사용 계획을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노신영 외무부장관은 회담 중에 급히 프로젝트 목록을 만들어 일본측에 제출하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과거 청구권 협상에서 청구권자인 한국이 총액에 목을 매면서 스스로 교섭상의 을의 지위를 자초했던 것처럼 전두환 정권 또한 당초의 ‘안보 경협’이라는 명분은 어느덧 잊어버린 채 ‘채권국’ 일본에 성의를 호소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40억달러 이하가 되면 제가 죽습니다. 대통령도 정권을 유지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한국측의 요구 수준은 어느덧 40억달러로 내려앉아 있었다. 노신영 외교부장관은 1981년 9월 10, 11일 제11회 한일각료회의 참석차 서울을 방문한 소노다 일본 외상에게 “5년간 40억달러도 안 되겠습니까”라며 매달렸다고 오구라씨는 최근 발간된 저서 ‘비록 한일 1조엔 자금’에서 공개했다. 하지만 한국측의 읍소에도 일본측은 명쾌한 답을 줄 수 없었다. 당시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 일본 대장상이 전두환과의 면담에서 말한 것처럼 “겉보기와는 달리 일본 정부는 가난했을” 뿐만 아니라 매년도 프로젝트 방식이 아닌 다년도에 걸친 총액방식 지원은 일본 국내법상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국측이 마지노선으로 정한 40억달러를 일본측이 어떻게든 충족하지 않고선 한일관계는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 버렸다.

이때 일본측 밀사로서 한일관계의 거간꾼으로 맹활약한 인물이 세지마 류조(?島龍三)이다. 일제 대본영의 작전참모 신분으로서 당시 만주군 장교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직속상관이기도 했던 세지마는 일제 패망 후 시베리아에 포로로 11년간 억류됐다가 돌아온 후 이토츄(伊藤忠)상사 회장 등을 역임했다. 자서전 ‘회상록’에서 대동아전쟁을 ‘자위(自衛) 전쟁’으로 규정했는가 하면,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이다. 이런 세지마가 전두환은 물론이고 노태우, 권익현 등 한국의 ‘신세대’ 정치인들과 일본의 ‘구세력’을 다시 이어주는 구원투수로서 등판한 것이다. 세지마는 한때 삼성물산 상무를 겸임하기도 해 인연이 있었던 권익현 민정당 사무총장과 함께 한일 간의 ‘40억 달러 총액 맞추기’ 작업을 막후에서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진출’로, 3·1 운동을 ‘폭동’으로 표현한 1982년의 제1차 일본 교과서 파동 때문에 ‘40억달러’ 논의는 일시적으로 중단되기도 했으나, 결국 1983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가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면서 결론 지어졌다. 1989년까지 7년간에 걸쳐 제공된 일본정부 차관 18억5,000만달러, 일본 수출입은행 융자 21억5,000만달러 등 총액 40억 달러는 전두환 및 노태우 정권기에 각종 사회기반시설 확충에 투여돼, 일본측 표현을 빌리면 한국 ‘신세대’ 정권의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 기여했다.

전두환이 “(한일관계를) 실질적으로 동맹관계까지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하자 나카소네는 “과거를 반성한다”고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과거사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예정에 없던 가라오케 대회에서 나카소네가 한국 트로트 ‘노란 샤쓰의 사나이’를 부르자 전두환은 일본의 엥카 ‘그림자를 연모하여’를 부르며 화답했다. 둘은 얼싸안았다.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의 청구권 협정 때도 한일 양국이 ‘청구권’ 개념을 완전히 다르게 설명했듯이, ‘안보 협력’이라는 거창한 명분에 대해서도 양국이 각각 편한 대로 해석하면 될 일이었다. 이렇게 한일관계는 한국의 군부정권에 의해 종래의 정치경제적 상호의존성을 이어갔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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