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칼질하다·무르끓다·치다… 백석 詩에선 이게 모두 '요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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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칼질하다·무르끓다·치다… 백석 詩에선 이게 모두 '요리하다'

입력
2015.05.20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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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에도 없는 방언·고어의 보고

98편 시어 3366개 의미 파헤쳐

잘못 알려진 해석 상당수 바로잡아

1937년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백석 시인. 한국일보 자료사진

“나는 이제 어늬 먼 외진 거리에 한고향 사람의 조고마한 가업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 그릇 사먹으리라 한다”

시인 백석(1912~1996)이 만주 망명 시절 쓴 ‘두보나 이백 같이’는 타향살이의 쓸쓸함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 한 그릇에 투영한 시로, 지금도 떡국에 대한 한국인의 애정을 말할 때 종종 호출된다. 여기서 쓰인 ‘가업집’은 사전에 없는 단어다. 학자들은 앞뒤 문맥을 따졌을 때 식당의 일종이라 보고 ‘가업으로 하는 식당’으로 추측해 지금까지 그런 의미로 통용돼 왔다. 그러나 고형진 고려대 국어교육학과 교수가 펴낸 ‘백석 시의 물명고’(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에 따르면 가업집은 가압집의 다른 말로, 국수나 떡, 엿 등을 전문으로 만드는 가게다. 평북방언사전에 등재된 ‘가압’은 ‘국수나 떡, 엿을 전문으로 만드는 업’이라는 뜻으로, 국시가압집, 떡가압집, 엿가압집 등의 용례가 나와 있다.

‘백석 시의 물명고’는 백석의 시 98편, 3,366개 시어의 의미를 낱낱이 파헤친 국내 최초의 백석 시어 사전이다. 고 교수는 “백석 문학생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1935년부터 1948년까지 발표한 모든 시의 시어를 의미 별로 분류해 뜻을 풀이했다”며 “백석의 시는 모국어의 박물관으로, 우리 문화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웅숭깊은지를 보여주는 보고”라고 말했다.

책을 보면 ‘모국어의 박물관’이란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일례로 ‘요리하다’와 관련된 동사만 굽다, 누르다, 닉다, 막칼질하다, 무르끓다, 밭어놓다, 뷔비다, 쑤다, 짓다, 치다 등 27개에 이르고, ‘이동’에 대한 동사는 가다, 거닐다, 나가다, 나려가다, 나리다, 날러가버리다, 날어나다, 낫대들다, 넘다, 단니다, 대여가다, 둥구재벼오다, 뒤서다, 따러가다, 멕이다, 삐쳐나다, 싸단니다 등 75개나 된다. 옷 하나도 그냥 쓰는 법 없이 당홍치마, 막베등거리, 쇠주푀적삼, 항라적삼 등 구체적으로 써 시인이 서민의 삶에 얼마나 애정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어들 중 상당수는 이북 방언이나 사전에 없는 고어라, 의미를 밝히지 못하거나 ‘가업집’처럼 잘못 알려진 것들이 많았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라는 시에서 시인은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었다”라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오력’은 지금까지 오금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고 교수가 이번에 ‘온 몸’으로 바로 잡았다. 그에 따르면 오력은 오륙(五六), 즉 오장과 육부라는 뜻으로 온 몸을 이르는 말이다. 고 교수는 백석이 다른 산문에서 ‘오륙’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고 시인이 자란 지역에서 오륙이 오력으로 음운변화가 일어난 사실을 알아냈다. 이밖에 물팩치기(무릎까지 내려오는 짧은 바지나 치마), 붕어곰(붕어를 푹 고아 만든 음식), 갓신창(가죽으로 만든 신의 신창), 곱조개(한쪽으로 약간 휜 조개) 등도 이번 연구를 통해 제대로 된 뜻을 찾았다.

고 교수는 “1983년 백석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이래 계속 관심을 갖고 사전과 관련 자료들을 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시어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며 “이번 사전은 30여 년간 이어온 백석 시어 연구의 종합판”이라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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