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도 없는 방언·고어의 보고
98편 시어 3366개 의미 파헤쳐
잘못 알려진 해석 상당수 바로잡아
![1937년 함흥 영생고보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백석 시인. 한국일보 자료사진](http://newsimg.hankookilbo.com/2015/05/20/201505201636417001_1.jpg)
“나는 이제 어늬 먼 외진 거리에 한고향 사람의 조고마한 가업집이 있는 것을 생각하고/이 집에 가서 그 맛스러운 떡국이라도 한 그릇 사먹으리라 한다”
시인 백석(1912~1996)이 만주 망명 시절 쓴 ‘두보나 이백 같이’는 타향살이의 쓸쓸함을 김이 모락모락 나는 떡국 한 그릇에 투영한 시로, 지금도 떡국에 대한 한국인의 애정을 말할 때 종종 호출된다. 여기서 쓰인 ‘가업집’은 사전에 없는 단어다. 학자들은 앞뒤 문맥을 따졌을 때 식당의 일종이라 보고 ‘가업으로 하는 식당’으로 추측해 지금까지 그런 의미로 통용돼 왔다. 그러나 고형진 고려대 국어교육학과 교수가 펴낸 ‘백석 시의 물명고’(고려대학교출판문화원)에 따르면 가업집은 가압집의 다른 말로, 국수나 떡, 엿 등을 전문으로 만드는 가게다. 평북방언사전에 등재된 ‘가압’은 ‘국수나 떡, 엿을 전문으로 만드는 업’이라는 뜻으로, 국시가압집, 떡가압집, 엿가압집 등의 용례가 나와 있다.
‘백석 시의 물명고’는 백석의 시 98편, 3,366개 시어의 의미를 낱낱이 파헤친 국내 최초의 백석 시어 사전이다. 고 교수는 “백석 문학생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1935년부터 1948년까지 발표한 모든 시의 시어를 의미 별로 분류해 뜻을 풀이했다”며 “백석의 시는 모국어의 박물관으로, 우리 문화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웅숭깊은지를 보여주는 보고”라고 말했다.
![](http://newsimg.hankookilbo.com/2015/05/20/201505201636417001_2.jpg)
책을 보면 ‘모국어의 박물관’이란 말은 과장이 아니다. 일례로 ‘요리하다’와 관련된 동사만 굽다, 누르다, 닉다, 막칼질하다, 무르끓다, 밭어놓다, 뷔비다, 쑤다, 짓다, 치다 등 27개에 이르고, ‘이동’에 대한 동사는 가다, 거닐다, 나가다, 나려가다, 나리다, 날러가버리다, 날어나다, 낫대들다, 넘다, 단니다, 대여가다, 둥구재벼오다, 뒤서다, 따러가다, 멕이다, 삐쳐나다, 싸단니다 등 75개나 된다. 옷 하나도 그냥 쓰는 법 없이 당홍치마, 막베등거리, 쇠주푀적삼, 항라적삼 등 구체적으로 써 시인이 서민의 삶에 얼마나 애정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어들 중 상당수는 이북 방언이나 사전에 없는 고어라, 의미를 밝히지 못하거나 ‘가업집’처럼 잘못 알려진 것들이 많았다.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라는 시에서 시인은 “나는 이 마을에 태어나기가 잘못이다/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나는 무서워 오력을 펼 수 없었다”라고 노래하는데 여기서 ‘오력’은 지금까지 오금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고 교수가 이번에 ‘온 몸’으로 바로 잡았다. 그에 따르면 오력은 오륙(五六), 즉 오장과 육부라는 뜻으로 온 몸을 이르는 말이다. 고 교수는 백석이 다른 산문에서 ‘오륙’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고 시인이 자란 지역에서 오륙이 오력으로 음운변화가 일어난 사실을 알아냈다. 이밖에 물팩치기(무릎까지 내려오는 짧은 바지나 치마), 붕어곰(붕어를 푹 고아 만든 음식), 갓신창(가죽으로 만든 신의 신창), 곱조개(한쪽으로 약간 휜 조개) 등도 이번 연구를 통해 제대로 된 뜻을 찾았다.
고 교수는 “1983년 백석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이래 계속 관심을 갖고 사전과 관련 자료들을 살피다 보니 자연스레 시어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었다”며 “이번 사전은 30여 년간 이어온 백석 시어 연구의 종합판”이라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