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량 정체가 이어지는 도심 터널 안, 나란히 운전 중이던 A와 B씨는 차 내부로 스며드는 매캐한 냄새에 놀라 황급히 차에서 내렸다. 그러나 이미 화재로 인한 연기가 터널 내부에 가득 찬 상황, 불행 중 다행으로 두 사람은 희미한 녹색 불빛을 발견한다. 바로 양쪽 출구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거리표시유도등인데, 먼 발치에서도 왼쪽 방향으로 달리는 사람 그림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연기를 많이 마신 A씨가 먼저 그림이 달리는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반면 B씨는 그림 아래 숫자를 읽고 왼쪽보다 오른쪽 출구가 훨씬 가깝다고 판단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그림을 따른 A씨와 숫자를 선택한 B씨, 과연 누가 살아 남았을까.
국내 터널 대부분의 거리표시유도등, 출구까지의 거리와는 상관없이 그림이 한쪽 방향으로만
방재 전문가들은 터널 내 화재 시 출구까지의 거리는 물론 발화지점이나 바람의 방향 등을 고려해 탈출 방향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위와 같이 상황판단이 어려운 경우 일단 출구 가까운 쪽으로 뛴 B씨의 생존 확률이 더 높아 보인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는 문자나 숫자보다 더 직관적이고 빠르게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한다. 결과와 관계 없이 A씨의 판단이 빨랐던 것도 그 때문이다. 비록 가상이지만 가까운 오른쪽 출구를 향해 달리는 그림이 표시되어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서울 남산3호 터널이나 금화터널 등엔 이미 가까운 출구 쪽으로 뛰는 사람 그림이 표시되어 있고 한국도로공사도 신설 터널에 보다 시각적인 그림 표지를 채택하고 있다. 이미지의 속성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국내 대부분의 터널 내 거리표시유도등 속 주인공들은 출구와의 거리에 상관 없이 한쪽 방향으로만 뛰고 있다.
문맹자ㆍ외국인도 쉽게 이해해야 할 공공안내 그림표지, 이미지만으로 알 수 없는 경우 많아
터널 내 화재처럼 급박한 상황은 아니지만 뜻이 모호한 안내 이미지 때문에 당황스러운 경우도 적지 않다. 비상구나 화장실, 장애인 시설 등 각종 안내표지판에 쓰이는 이미지를 ‘공공안내그림표지(그래픽심볼)’라고 하는데 글씨를 모르는 문맹자나 외국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별도의 설명 없이는 도저히 의미를 알 수 없거나 오히려 안내문자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경우도 주변에서 쉽게 눈에 띈다.
경기 고양시의 한 공원 시설물에 설치된 공공안내그림표지.‘유아 및 어린이는 보호자와 동반하세요’라는 메시지를 부모와 아이가 함께 서 있는 이미지만으로 전달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지하철역 대합실 표시나 비상시 탈출 표시 등도 별도의 안내문 없이 뜻을 짐작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위급상황에 필요한 소화기나 비상출입문, 비상전화 표시를 아예 한글로만 표시하는 바람에 외국인이나 문맹자에겐 무용지물이 돼 버린 경우도 흔하다.
같은 의미지만 모양이 제각각 이라서 혼란스러울 때도 있다. 지하철역사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 사용주의 표시는 서울메트로나 도시철도공사, 코레일에서 게시한 것과 제조 및 관리 업체가 제작한 이미지가 서로 다르다.
널리 통용되는 장애인이나 노약자 표시 역시 장소에 따라 모양이 다양하고 화장실이나 버스 정류장, 출입금지 등도 설치 주체나 시기에 따라 디자인이 천차만별이다. 여기에 국가기술표준원이 권고하는 공공안내그래픽심볼을 비교하면 혼란은 더욱 커진다. 기술표준원 관계자는 “지자체나 공공기관 등에 지난해 국제표준(ISO)을 따라 채택한 국내표준(KS) 그래픽 심볼을 활용하도록 권고하고 있지만 교체비용 등 현실적 문제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장영호 서울시 공공시설디자인팀장은 “이미 많은 시민들에게 익숙한 그림표지를 국제 표준을 따르기 위해 다시 교체할 경우 오히려 더 큰 혼란이 생길 수 있다”며 “다만, 이미지만으로 의미 전달이 확실치 않은 공공안내그림표지는 개선해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암호문 같은 공공안내그림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이명현 인턴기자(숙명여대 미디어학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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