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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깊고 넓게" 역사를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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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깊고 넓게" 역사를 재해석

입력
2015.04.24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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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횡무진 한국사 1ㆍ2, 동양사, 서양사 1ㆍ2 남경태 지음 휴머니스트 발행ㆍ각 권 500~580쪽,1만 7,000~2만 3,000원
종횡무진 한국사 1ㆍ2, 동양사, 서양사 1ㆍ2 남경태 지음 휴머니스트 발행ㆍ각 권 500~580쪽,1만 7,000~2만 3,000원

사람은 가고 책만 남았다. 지난해 말 세상을 떠난 인문학 저술가 겸 번역가 남경태씨가 병상에서 마지막 원고로 서문을 쓴 ‘종횡무진’ 역사 시리즈의 개정증보판 5권이 한꺼번에 나왔다. 고인이 자신의 대표작이라며 가장 애착을 쏟았고 이승을 떠나기 전까지 머리말을 고쳐 쓴 역작이다.

1998년 ‘종횡무진 동양사’를 시작으로 1999년 ‘종횡무진 서양사 1, 2’, 2001년 ‘종횡무진 한국사 1, 2’로 완결된 이 시리즈는 표제처럼 종횡무진 시공간을 넘나들며 자유분방하면서도 역사 의식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서술로 대중적 역사 교양서의 전범을 이룩했다. “깊으면 좁아지고 넓으면 얕아지게 마련”인 딜레마를 넘어 “깊으면서도 넓을 수는 없을까”를 고민하려 쓴 책이다. 저자의 죽음으로 최종판이 되어버린 이번 개정증보판은 저자가 다시 쓴 서문을 넣고 내용을 일부ㆍ수정 보완하고 사진과 지도를 많이 바꿨다.

저자 서문에 나오듯 전 세계를 통틀어도 동양사, 서양사, 한국사를 한 사람이 책으로 엮어낸 사례는 드물 것이다. 방대한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이 시리즈를 더욱 빛내는 것은 역사를 재해석하는 비판적 시각이다. 통찰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을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해냈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 그치지 않았다. 과거를 오늘에 비추고 동과 서를 나란히 대비하며 지금 여기의 시공간 좌표를 짚어낸다. 프랑스혁명 직후 나폴레옹과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을 비교하며 죽 쒀서 개 준 꼴이 되어버린 당시 정황을 서술한다든지, 400년 전 일본 통일의 밑거름을 뿌린 권력자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는 과정을 그 닮은꼴인 한국의 1979년 10ㆍ26과 12ㆍ12사태와 겹쳐 설명하는 식으로 그야말로 종횡무진하며 생생하게 역사를 서술한다. ??

깊이를 놓치지 않으면서 딱딱하지 않아 술술 읽히는 것도 장점이다. 아무데나 펼쳐도 자유분방하고 명쾌한 서술과 마주친다. 예컨대 한국사 시리즈 제2권의 154~155쪽에 나오는 450년 전 인물 윤원형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잔머리를 굴린 대가로 공신의 지위에 오른, 현대의 조폭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양아치.” 윤원형은 중종 사후 누이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은 외척이다. 잔머리니 양아치니 하는 직설적인 표현을 그저 자극적인 양념으로만 썼다면 경망스럽겠지만, 어깨에서 힘 빼고 정확하면서 알기 쉽게 설명하는 저자 나름의 방식이라 오히려 친근감을 준다. ?

이 시리즈를 쓰면서 고인이 원한 것은 역사를 알기 쉽게 정리하는, 다시 말해 역사의 교통경찰과 같은 역할을 넘어, 역사를 재해석해 연주하는, 말하자면 역사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였다. 같은 오케스트라도 누가 지휘하느냐에 따라 다른 음악을 들려주듯 이 시리즈는 저자 개인의 철학과 개성이 뚜렷하다.

서문 맨끝에 고인은 이렇게 썼다.

“지은이의 향기가 나지 않는 책은 가치가 없고, 좋은 텍스트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 지은이의 향기가 진하다. 독자들이 이 종횡무진 시리즈에서 지은이의 체취를 느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출판사 편집자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고인은 생전에 주로 역사와 철학에 관한 책을 쓰거나 번역했다. 35종 39권의 저서와 99종 106권의 번역서를 남겼다. 누구와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도 막힘이 없는 박학다식, 번뜩이는 지성과 뜨거운 열정, 구수한 입담으로 듣는 이의 넋을 빼는 유쾌한 수다장이였다. 이제 책으로밖에 만날 수 없게 된 그를, 많은 이들이 오래오래 그리워할 것이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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