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스포츠 산업화 속 스포츠와 디자인의 결합은 선택이 아닌 필수. 경기라는 상품을 어떻게 포장해 내놓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무궁무진해집니다. 총 10회에 걸친 '스포츠, 디자인을 입다' 기획을 통해 한국 프로스포츠의 가치를 높인 사례를 조명합니다.
“이제 와서 말하지만 너무 불편했어요. 화장실 한 번 다녀오려 해도 힘들고, 통풍도 안 돼 땀이 나면 몸싸움 하기도 찜찜했어요. 가장 힘들었던 건 수치심이죠. 트레이닝 복을 벗을 때 모두가 우리 몸매만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여자농구 스타 출신 정은순(44) WKBL TV 해설위원은 1998년 여자 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선보였던 이른바 ‘쫄쫄이 유니폼’을 생각하면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정 위원은 “그 시절 함께 뛰었던 다른 선수들도 야하다, 민망하다는 반응이 많았다”며 “연맹에서 주장했던 경기력 향상 효과는커녕 흥행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고 꼬집었다.
● 실패로 끝난 ‘급진 개혁’
1990년대 후반 여자 프로농구를 시작으로 여성 스포츠의 프로화가 확산되면서 종목별, 구단별로 '섹시 코드' 전략을 실행에 옮겼다. 전략의 핵심 소재는 바로 유니폼. 여자 선수들의 몸매를 자연스럽게 드러내면서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겠다는 의도였다.
그 첫 단추가 앞서 정 위원이 언급한 ‘쫄쫄이 유니폼’이었다. 하지만 딱 달라붙는 원피스형으로 제작돼 선수들의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난 이 유니폼은 도입 초반부터 선정성 논란이 일며 1년여만에 자취를 감췄다. 농구계 전반에서 “지금 생각해도 과했다”고 평가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던 탓이다.
비슷한 시기, 배구계에서도 ‘혹시나’ 하며 꺼냈던 ‘섹시 유니폼’ 카드가 ‘역시나’ 실패로 끝났다. 대한배구협회는 1999년 슈퍼리그 개막을 앞두고 어깨와 엉덩이 라인이 드러나는 유니폼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가 선수들의 강한 반발에 한 발 물러섰다.
이 같은 '급진 개혁'이 번번이 실패로 끝나자 '섹시 유니폼' 도입 열풍은 한동안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지난 2013년 이 논란이 다시 한 번 불붙었다. 여자배구 흥국생명이 짧은 바지 위에 치마를 더한 '치마바지 유니폼'을 도입하면서부터다.
● 배구 코트에 분 ‘치맛바람’
당시 치마바지 유니폼을 도입했던 흥국생명 최진섭 브랜드디자인 팀장은 “치마바지 유니폼은 유럽 프로배구 무대에서 벤치마킹 한 사례”라면서 “여성미가 강조되고 활동성도 용의할 것이라는 판단해 도입을 결정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갑작스레 분 배구 코트의 ‘치맛바람’에 일부 관중은 “관음증을 자극한다”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고, 몸매를 강조하는 유니폼이 스포츠의 본질을 훼손시킨다는 지적도 일었다. 이 때도 역시 쟁점은 '성(性) 상품화'였다.
하지만 인식의 변화도 감지 할 수 있었다. 과거 쫄쫄이 유니폼 때에 비해 팬들의 호평이 크게 늘었다. 피겨 스케이팅이나 체조, 볼링, 테니스 같은 종목의 의상과 견주어 볼 때 특별히 선정적이라고 볼 수 없고 신체 노출도 많지 않아 보기에도 부담스럽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비슷한 시기에 선보인 여자농구 삼성생명의 새 유니폼도 어깨와 허리 라인을 강조하며 한 층 더 예뻐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변화의 폭은 크지 않았지만 이 또한 여성미를 강조하기 위한 점진적 변화였다.
● '패션 트렌드' 쫓는 유니폼들
차이는 변화의 주체다. 과거 여성 프로스포츠의 유니폼 정책 변화가 연맹의 주도하에 강제됐던 데 반해, 최근에는 구단들이 직접 나서 유니폼 디자인을 개선한다. 대다수 구단들이 유니폼 디자인 확정에 앞서 패션 트렌드를 파악하고 선수와 팬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창단 때부터 구단의 상징인 ‘타란툴라(거미의 한 종류)’에서 착안한 거미줄 패턴과 대표색인 핑크 컬러를 활용해 유니폼 디자인을 선도했다는 평가를 받아 온 여자배구 흥국생명은 패션 트렌드 조사를 시작으로 지난 시즌 유니폼에 대한 피드백, 문제점 보완, 제작사와 의견 공유, 새 유니폼 시안 제작, 시안 공유 및 선수 착용, 최종 피드백 등 총 7~8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최진섭 팀장은 “매 시즌 많은 과정을 거치며 시행착오를 줄여간다”며 “최근에는 유니폼이 일상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지도 고려하며 기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연맹들도 이 같은 구단들의 자체적 노력에 반색하고 있다. 김대진 대한배구연맹(KOVO) 홍보마케팅팀장은 “구단들이 여성들이 탐낼 법한 유니폼 디자인을 내놓는 것 같다”며 “몇몇 구단의 유니폼의 경우 패션 디자이너들도 호평하는 수준”이라고 전했다.
● “예뻐진 선수들, 더 예쁘게…”
유니폼의 진화에 대한 고민은 끝이 없다. 김일구 WKBL 홍보마케팅 팀장은 “최근엔 구단들이 유니폼 디자인을 위해 꾸준히 연구하는 분위기”라며 “성 상품화 논란에 대해서도 정서상의 절충점을 찾아 가면서 여성미를 살리기 위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선수들의 평균 신장이 커지고, 선수 스스로가 외모에 신경을 쓰는 추세도 이 같은 고민들과 궤를 같이한다.
팬들 역시 이같은 점진적 변화를 반기고 있다. 여자 프로배구를 출범 초기부터 즐겨 봤다는 이용숙(35 · 인천 계양구) 씨는 “초창기 프로선수들의 유니폼에선 멋을 찾기 힘들었지만, 요즘의 여자 배구 유니폼은 탐날 정도로 예뻐졌다”고 말했다. 이 씨는 특히 “여자 운동선수들의 군살 없는 몸매는 여성들이 선망 대상”이라며 “이 같은 인식 변화에 발맞춰 조금은 더 과감해져도 거북하지 않을 것 같다”고 밝혔다.
김대진 KOVO 홍보마케팅 팀장 역시“이제 ‘섹시’에 대한 의미와 기준이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면서 “과거의 급진적인 변화 대신 패션 트렌드와 발맞춘 유니폼들이 출시된다면 경기력과 흥행 모든 면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은순 위원도 이 같은 방향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 위원은 “(자신의) 현역 시절과 비교해 보면 요즘 선수들은 실력은 물론 외모도 함께 가꿀 줄 안다”면서 “선수들의 예쁜 외모가 더 돋보일 수 있도록 돕는다면 여성 스포츠 흥행에도 적잖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정 위원은 그러나 “선수들이 지나친 노출 때문에 경기력에 지장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한다”며 선배로서의 바람도 함께 전하면서 “여성미 강조와 성 상품화의 균형을 잘 맞춰가는 게 연맹과 구단들의 역할”이라고 짚었다.
김형준기자 mediaboy@hk.co.kr
최주호 인턴기자 (서강대 정치외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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