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계급사회의 그늘] (5ㆍ끝) 임금 불평등 해소 방안은

산업화 후 수십년간 호봉제 고수

근속연수 따라 임금격차 확대

맡은 업무 기반으로 급여율 결정

명확한 기준 세워 신뢰부터 얻어야

DHL 코리아 직원들이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이 회사는 2005년 외부 컨설팅을 통해 업무를 170여개로 나누고 직무에 따라 임금 체계를 개편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회사에서 임금체계를 바꾼다고 했을 때 저도 암울했죠. 1년만 채우면 계장 시험을 볼 수 있었는데, 승진 시험이 없어져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국제물류기업인 DHL코리아 입사 20년째인 김경진(45ㆍ가명)씨는 올해 2월 부장으로 승진했다. 고졸 학력으로 입사한 김씨가 핵심부서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노력과 업무 능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무에 따른 임금 체계를 채택한 회사 분위기가 큰 영향을 줬다는 평가다.

그가 DHL코리아에 입사한 건 1995년. 처음에는 공항에서 관세 업무와 세금계산서 발급 등을 담당했다. 회사는 근속연수 3~4년이 지나면 진급 시험을 거쳐 승진 대상자 중 대리급은 30~40%, 과장급은 10~20% 승진발령 하는 연봉제 임금체계를 운영했다.

김 부장은 “당시에는 기본적인 물가인상률에 근속연수를 적용해 임금이 결정됐는데 스펙이 좋은 사람, 상사 눈치보며 무조건 오래 일하는 사람이 승진에 유리했다”며 “승진 시험 과목도 상식, 영어, 경제학 개론 등 실무에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고 말했다.

회사에 변화가 온 건 2000년대 중반부터. 1975년 국내 진출 이후 한때 연간 성장률이 50%까지 치솟았던 회사는 점차 실적이 나빠졌고, 호봉이 높은 직원들도 많아졌다.

이에 회사는 2006년 외부 컨설팅을 통해 회사 내 모든 업무를 170여 개로 나누고 각 직무에 따라 업무강도와 필요한 기술 등급을 책정했다. 다른 기업의 임금과 비교한 뒤 해당 직책과 직무에 따라 임금을 재조정했다. 임금 전문컨설팅 회사에 의뢰해 주요 기업의 직급별 임금을 참고한 뒤 객관적인 임금 수준을 마련했다.

박두석 DHL코리아 인사본부장은 “2005년 임직원 교육을 시작해 호봉제에서 직무직능급제(업무와 능력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는 방식)로 임금체계를 바꾸는데 꼬박 4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직무급에 대한 저항이 크기 때문에 외부 컨설팅을 통해 직원들에게 ‘객관적 평가’라는 신뢰감을 주고, 임금체계 변화로 수입이 줄어드는 직원이 없도록 제도를 세밀하게 설계한 게 주효했다”고 말했다.

회사의 철저한 준비에도 시행 초기엔 직원들이 적잖은 불만을 드러냈지만 직무급(맡은 업무를 기반으로 급여율을 결정하는 형태) 제도는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김 부장은 “2008년 배송 직군에 있던 직원들이 금융 담당으로 자리를 옮겨 승진하는 사례가 나오기 시작했다”며 “스펙 보다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영어에 능숙한 직원들이 좋은 평가를 받아 승진하면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각 직무에 필요한 능력과 프로세스가 공개되자 공정한 인사가 이뤄졌다. 김 부장 역시 잠시 접었던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2010년 대학에 입학해 경영학을 공부했고, 현재 야간대학 MBA과정 2년차에 접어들었다. 그는 “일의 과정이 노출돼 있어 개인이 하는 업무에 대한 인사평가도 객관적으로 이뤄진다”고 덧붙였다.

갈수록 심화되는 임금 불평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전문가들은 직무급을 기반으로 한 임금체계 개편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김재호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연구원은 “국내 노동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같은 일을 하는데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가 크다는 것”이라며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기업을 넘어서는 임금체계, 초기업 단위의 직무급 임금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십년 간 호봉제 중심 임금체계를 채택해온 국내 현실을 감안하면 개선은 쉽지 않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오르기 체계 때문에 입사 초기 적은 임금을 감수했던 근로자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원은 “유럽이 과거 40~50년간 산업별 업무에 따른 임금 수준을 논의해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만든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임금을 결정하는 방식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라고 지적했다.

직무별 임금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고 근로자들의 신뢰를 얻는 과정도 필요하다. 김재호 연구원은 “현재 정부와 재계의 직무급제 논의는 대기업 임금을 낮추는 데만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동일노동 동일임금 정의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먼저 직무별 임금비교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직무급제 개편이 가능한 산업 분야부터 찾아 한국형 직무급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제안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장원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센터 소장은 “몇 개의 대기업이 사업을 독점하는 분야는 대기업의 협조 없이 임금체계를 개편하기 쉽지 않고, 노조도 강력하게 저항한다”며 “독과점이 약해 임금 수준이 비슷한 기업들끼리 경쟁하는 ‘말랑말랑한 산업’부터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직무급제 도입을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국내의 경우 대기업 독점이 무너진 건설업과 섬유산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김종진 연구원은 “과도기적으로 한국식 모델을 만들어가면서 정부가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할 때 각 직무별 임금을 정해 모든 공공기관에 일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도 생각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부가 나서서 영세기업의 질 낮은 일자리 처우를 개선하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장원 소장은 “대기업이 최상위에 있고, 대다수 하청업체가 산업을 지탱하는 분야의 경우 법적인 잣대로 임금 격차를 줄여야 한다”며 “성별과 연령에 의한 임금차별을 법으로 규정해 시정하도록 한 것처럼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입각해 원ㆍ하청간 과도한 차별에 대해 시정할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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