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린 여인, 현앨리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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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마타하리로 불린 여인, 현앨리스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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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0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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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현순 목사의 맏딸, 中·美서 사회주의 활동하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美군정에 의해 간첩 혐의로 추방

북에서 박헌영 애인으로 몰려 1956년 평양서 처형당해

정병준 교수 3년여 걸쳐 자취 추적, 이념시대 비극적 경계인의 삶 복원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정병준 지음. 돌베개.

현앨리스는 남편 정준과 결별하고 하와이로 건너와 1927년 아들 정웰링턴을 낳았다. 산욕에 시달린 듯 부은 얼굴이지만 그녀가 남긴 사진 가운데 가장 행복한 표정이다. 현앨리스의 입북 뒤 체코에 홀로 남은 정웰링턴은 한때 어머니가 있는 평양으로 가길 희망했으나 끝내 꿈을 이루지 못했다. 사진은 현앨리스의 동생 현데이비드의 회고록에 남아있던 것이다. 돌베개 제공

안과 밖 어디에도 깃들 수 없었다. 남녘에서 “좌익과 내통하는 악마적 존재”로 불리며 버림받았다. 뒤이어 찾은 북한에서 “미제 스파이”로 몰려 처형됐다. 독립운동가의 딸 현앨리스 이야기다. 북한은 그녀를 김일성의 정적 박헌영의 첫 애인으로 지목했다. 그 탓에 ‘한국판 마타하리’라는 이미지로 어렴풋이 알려져 온 그녀를 휩쓴 소용돌이를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가 복원했다. 시대에 휘감긴 비운의 운명이었으되 끝내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놓지 않았던 주체적 여성, 역동의 시기 주변인의 삶이 재구성된다.

이야기는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한다. 박헌영이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재학시절인 1929년 각국 청년 혁명가들과 찍은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정 교수는 이 사진을 1921년 상하이에 유학 중이던 한국 학생들이 모여 찍은 것으로 봤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진 속에서 뒤늦게 발견된 현앨리스와 동생 현피터의 존재를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1921년 상하이 화동한국학생연합회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보타이를 맨 앳된 박헌영(앞줄 왼쪽에서 세번째), 현피터(다섯번째)와 일본식 교복을 입은 현앨리스(뒷줄 왼쪽에서 일곱번째), 주세죽(여덟번째). 돌베개 제공.

정 교수는 사료 조사로 현앨리스의 얼굴에 익숙해진 2013년에서야, 평소 자주 봤던 이 사진에 두 사람이 등장한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국제레닌학교의 일본 재학생인줄로만 알았던 세라복 차림 여성이 현앨리스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소름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고 했다. 왜 북한이 1955년 그녀를 처형하며 “박헌영의 첫 애인”으로 봤는지 짐작할 수 있는 단서, 두 사람의 인연에 관한 실마리가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북한의 우격다짐과 달리 두 사람이 연인관계였을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박헌영은 이미 1921년 봄 주세죽과 결혼했고, 현앨리스도 다음해 일본 유학과정에서 만난 남자와 상하이에서 결혼했다.

현앨리스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의 맏딸로, 1903년 하와이에서 출생한 첫 번째 한국 아이다. 한국 이름은 현미옥이다. 현 목사는 노동이민자들의 통역으로 미국 하와이에 갔다. 현앨리스는 가족과 함께 다섯 살 때 한국으로 돌아와 자랐고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이화여대를 다녔다. 현 목사는 미국과 일본을 경험한 기독교 목사였을 뿐 별다른 정치성향이 없었다. 그와 가족의 운명을 역사의 급류로 급격하게 끌어들인 것은 3ㆍ1운동이었다.

민족주의로 달아오른 현 목사는 3ㆍ1운동 직전 상하이로 망명했고 3ㆍ1운동의 발발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미국에 전하는 ‘조선독립단’ 상하이 특별대표역을 자임했다. 이듬해에는 미 워싱턴으로 건너가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하와이 마닐라 등을 거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뒤늦게 아버지를 따라 가족이 모두 상하이로 향하면서 현앨리스 역시 3ㆍ1운동의 에너지로 역동하는 상하이를 목도하게 된다.

1919년 중반 상하이에 몰려든 한인은 1,000명을 상회했다. 여운형, 김규식, 현순은 물론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이 모두 상하이에서 반일 민족주의를 도모했다. 임시정부가 노선대립으로 동력을 잃자 박헌영 등이 모스크바와 사회주의로 급격하게 눈을 돌렸다. 그 무렵 현앨리스 역시 고려공산당과 관련된 연락 임무를 띠고 조선, 일본, 상하이,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오간 정황이 발견됐다.

그 사이 현앨리스는 결혼했지만 남편 정준이 조선총독부 산하 관리가 된 후 네 살 난 딸을 두고 이혼해 하와이로 거처를 옮겼고 1927년 홀로 아들 정웰링턴을 출산했다. 그녀는 하와이에서 다시 노동조합운동, 미국공산당 활동 등을 이어갔다. 저자는 그녀가 “3ㆍ1운동 이후 한인사회의 혁명적 분위기와 시대정신의 영향을 몸에 새겼다”고 봤다. “정확히 말해 그녀가 매료된 것은 사회주의 이념이라기보다는 민족주의와 결합한 사회주의적 이상주의자들이 뿜어내던 열정과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해방 후 미군정의 민간통신검열단 소속으로 도쿄를 거쳐 다시 고국 땅에 돌아왔다. 주한미24군단 정보참모부 산하 민간통신검열단(CCIG-K)의 부책임자로 일하던 그녀는 1946년 첩자 혐의를 받아 하와이로 추방된다. 주한미군 내 공산주의자들과 박헌영을 면담한 것이 문제였다. 당시 미군정은 그녀를 “CCIG-K의 임무를 파괴한 악마”로 기록했다. 군단 통역으로 일하던 현피터도 함께 추방됐다.

1948년 9월 정웰링턴이 체코로 떠나기 전 미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한 가족사진. 왼쪽부터 현피터, 현안나(피터의 부인) 현데이비드, 현데이비드균(데이비드의 아들), 현앨리스, 현순, 현메리함(데이비드의 부인), 현프릴랜드탄(데이비드의 아들), 현마리아리(현순의 부인), 정 웰링턴. 돌베개 제공

이후 미국에서 재미조선인 민주전선 등에 관여한 현앨리스는 46세 때 북한으로 향했다. 자신이 꿈꿨던 모국이 북한에 존재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알려진 것처럼 그녀는 1956년 평양에서 처형됐다. 30여년 전 사진 속 인연이 빌미가 됐다.

남겨진 이들의 삶도 불행했다. 현앨리스의 다른 두 동생은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던 당시 미국에서 공산주의자 낙인으로 고초를 겼었다. 체코에 남은 정웰링턴은 외과의사로 일하다 1963년 독극물을 삼켜 세상을 등졌다.

정 교수는 3년여에 걸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체코 프라하에서 찾은 수많은 문서와 증언 등을 통해 현앨리스 가족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낸 역사의 현장을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그는 현앨리스가 “의지적 인간이었다”고 단언한다. “시대가 그녀를 이끌었고 운명이 때때로 그녀를 희롱했지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자기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이상과 고향을 추구했고 그 어느 곳에도 깃들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했다.”

제47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 ‘한국전쟁’을 비롯해 굵직한 저술들을 쏟아 온 저자의 다음 연구주제는 아직 미정이다. “현앨리스 가족의 삶은 우리가 몰랐던 수많은 재미한인 진보주의자들의 마지막 모습과 닿아있다”며 “시대와 역사에 으깨진 삶들을 해원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선명히 드러나는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성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는 그의 목소리는 침중했다.

그의 책은 ‘무엇이 비극적 경계인을 만들었는가’라는 것 외에도 숱한 물음을 파생한다. 당신과 나의 영혼을 추동하는 어제의 사건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떤 역사의 급류에서 발버둥치고 있는가. 우리 시대로부터 부정당한 숱한 경계인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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