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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행 대부분 자산 도쿄지점 이체… 결국 일본 국고로

입력
2015.03.16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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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의 발권준비 조차 챙기지 못한 한국

해방 직전 이체한 조선은행 자산을 국고 환수한 일본

서울의 조선은행 본점. 오랫동안 한국은행 본점으로 이용되다가 2001년 이후 화폐박물관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1950년 6월 100% 정부출자(1,500만원)로 설립된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의 채권채무를 계승한다고 명시(한국은행법 제117조), 조선은행의 후계임을 자임했다.
서울의 조선은행 본점. 오랫동안 한국은행 본점으로 이용되다가 2001년 이후 화폐박물관으로 재활용되고 있다. 1950년 6월 100% 정부출자(1,500만원)로 설립된 한국은행은 조선은행의 채권채무를 계승한다고 명시(한국은행법 제117조), 조선은행의 후계임을 자임했다.

일본이 연합국에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사실상 항복을 통보한 1945년 8월10일 경성(서울)의 조선은행 본점은 긴급 이사회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일본인 이사들은 본점 명의의 유가증권 47억엔을 도쿄 지점으로 서둘러 이체키로 결정했다. 이 같은 긴급조치를 취한 이유에 대해 당시 조선은행 부총재였던 호시노 기요지(星野喜代治)는 “그대로 나둬서는 나중에 곤란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라고 증언했다.

이 자산이 도쿄 지점으로 옮겨진 후 파장은 너무나도 컸다. 경성 본점이 가진 유가증권은 5,100만엔에 불과한 반면, 도쿄 지점 보유분은 56억엔으로 급증했다. 더욱이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조선은행권은 남한에서만 87억엔이나 유통됐지만 경성 본점이 이에 대한 발권준비로 확보한 자산은 7억엔에 불과했다. 돈은 넘쳐나는데 돈 값이 종이 값보다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면, 이 은행의 도쿄 지점에는 67억엔이나 되는 자산이 남아 있었다. 자산의 대부분을 일본에 남긴 빈털터리 중앙은행을 안고 신생 대한민국은 출항했다.

한국 정부가 1949년 10월 대일 청구권협상에 대비해 작성한 ‘대일배상요구조서’는 “이것은 전쟁의 승부와는 하등 관련이 없는 단순한 기성(旣成) 채권채무 관계이며, 따라서 절대로 관철해야 할 요구이며 권리”라고 단언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툭하면 ‘금괴’를 빼앗겼다고 분통을 터뜨린 것도 다름 아닌 조선은행의 재일자산을 반환하라는 의미였다. 한국측 대일 청구권의 핵심을 차지했던 조선은행의 재일자산은 그러나 한일회담에서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한 채 일본 정부에 의해 그 대부분이 몰수된 후 일본인 주주 등에게 분배되었다.

● 미, “한일 간에 논의하라”며 자산동결 조치

“연합국은 세계역사상 유례없는 금융조작의 실태를 낱낱이 밝히고자 한다. 조선은행을 지배한 금융업자는 마치 군벌이 한 짓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대륙 팽창을 지원했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국군총사령부(GHQ)의 크래머(Raymond Kramer) 대령은 1945년 9월30일 조선은행을 ‘식민지 금융자산의 동원과 금융조작’을 통해 일본 군국주의를 지원한 ‘첨병’으로 규정하고 일본 내 지점에 대한 폐쇄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행 일본지점은 ‘폐쇄기관’으로 지정돼 채권회수 및 채무변제, 부동산 매각 등 ‘특수청산’에 들어갔다.

여기서 ‘특수청산’이라 말한 것은 청산과정에 구경영진을 철저히 배제한데다, 청산대상을 일본 내 자산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조선은행은 식민지 한반도의 중앙은행으로서 조선은행권을 발행한 발권은행이면서, 동시에 중국 등 동아시아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영업망을 전개한 국제적인 상업은행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본·지점 간의 계정이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일단 해외분을 제외한 채 일본 내 자산만을 청산토록 한 것이다. 이 같은 ‘특수청산’은 청산업무를 수행한 일본 당국조차도 일본 내 자산만으로는 “부채가 많아 적절한 청산이 불가능하다”고 불평할 정도였다.

이처럼 청산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특히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한 제4조가 윤곽을 드러내자 GHQ는 1950년 11월 이들 자산을 사실상 동결하는 결정을 내렸다. 미국은 이 자산이 강화조약 제4조가 제기한 ‘특별협정’의 의제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향후 한일 간에 논의해 처분하길 기대한 것이다. 더욱이 신생국가의 분리·독립에 관한 국가계승론에 따르더라도 분리지역(한국)에서 유통되는 통화의 보증준비는 계승되는 것이 통례였다. 이와 관련해 일본 외무성조차도 내부적으로는 조선은행 도쿄 지점이 보유한 일본 국채가 발권보증으로 간주된다면 한국에 돌려줘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었다.

● 일, 청산잔여금 대부분을 ‘국유화’

하지만 강화조약이 발효되고 일본이 주권을 되찾게 되자 일본 국내에서는 그때까지 ‘전범’ 취급을 받았던 조선은행의 재일자산을 주주, 예금자 등 일본 내 이해관계자들이 나눠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분출했다. 공직에서 추방됐던 전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는 일본 국회에서 “조선은행은 결코 조선의 은행이 아니다. (일본) 국내 법인이다. 주주의 권리를 무시하고 당시 경영자를 배제한 채 함부로 청산하는 것은 헌법 위반이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일본 정부도 1953년 8월 폐쇄기관령을 대폭 완화, ‘미 점령군’이 채워놓은 조선은행에 대한 ‘족쇄’를 완전히 풀어버렸다. 호시노는 조선은행의 특수청산인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예상치도 못했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돈’이 생기자 온갖 아이디어가 난무했다. 구경영진은 주주의 권리를 내세우며 후계은행의 설립을 추진했다. 이에 맞서 한반도에 재산을 남기고 빈손으로 돌아온 일본인들은 이 돈을 자신들의 복지를 위해 쓸 것을 요구했다.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통산상은 일본의 미래를 위한 대규모 과학기술 펀드를 만들자고 했다. 자민당 국회의원들은 중소기업진흥은행이나 무역센터, 국민차육성회사 등 대형 국가프로젝트를 창출하는데 쓰자고 주장했다.

이처럼 조선은행 재일자산을 둘러싼 이권다툼이 치열한 가운데 1956년 일본 대장성은 청산잔여금의 대부분을 국고로 환수키로 결정했다. 이는 그 해 일본의 예산안 편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당초 이치마다 히사토(一万田尙登) 대장상은 1조엔 이내의 긴축예산을 명언했는데 실제 일반회계는 1조349억엔까지 늘어 세수 확보가 난관에 봉착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가 국고 환수를 위해 내세운 법적 논리는 과거 일제가 만든 조선은행법에 따르면 조선은행은 발권특권에 따른 영업이익금의 일부를 국가에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조선은행 재일자산은 청산잔여금 67억엔 가운데 50억엔을 각종 납부금이나 세금 명목으로 일본 국고에 환수된 후 남은 17억300만엔이 주주에게 귀속됐다. 일본 정부가 취한 50억엔을 1945년 해방 당시의 환율(1달러=15엔)로 적용하면 공교롭게도 1965년 한일협정에서 일본이 청구권 명목으로 한국에 무상 지급키로 한 3억달러를 약간 넘는 금액이다.

조선은행의 일본 내 후계회사라고 할 수 있는 도쿄의 아오조라은행 본점. 아오조라은행은 조선은행의 재일자산을 토대로 설립된 일본부동산은행과 이를 계승한 일본채권신용은행의 명맥을 이어받은 은행으로 한국계 손마사요시씨가 대주주이다.
조선은행의 일본 내 후계회사라고 할 수 있는 도쿄의 아오조라은행 본점. 아오조라은행은 조선은행의 재일자산을 토대로 설립된 일본부동산은행과 이를 계승한 일본채권신용은행의 명맥을 이어받은 은행으로 한국계 손마사요시씨가 대주주이다.

● 한일 청구권협상을 무시한 일방적 청산

그러나 조선은행 자산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산더미 같은’ 납부금 부과는 일본 국내에서도 상당한 논란을 야기했다. 우선 청산잔여금을 확정 짓기 위해서는 해외의 자산과 부채를 확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한일관계가 단절된 상황에서 이는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초기에 조선은행의 특수청산을 관장했던 이시바시 료기치(石橋良吉)가 지적했듯이 “일본에 아무리 많은 돈이 있더라고 외국의 것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을지 모르므로 잔여자산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 현실이었다. 특히 조선은행 청산잔여금의 대부분을 차지한 일본 국채는 일본 정부가 막대한 납부금을 부과하면서 내세운 ‘발권에 기초한 이익’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었다. 가령 1945년 4월 현재 조선은행의 발행고는 29억엔이었는데 이에 대한 발권이익은 2,400만엔에 불과했다. 전체 발행고의 1% 미만 수준이었던 발권이익에 대해 발행고에 버금가는 세금을 때린 셈이다.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일본 정부의 조치가 사실상 한일 청구권협상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행위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일방적 조치는 무엇보다 한일 간의 ‘특별협정’을 적시한 강화조약 제4조에 저촉될 수 있었다. 미국도 한일 당사자 간에 해결하라고 이들 자산을 동결 조치한 것이다. 당시 일본 국회에 출석한 저명한 경제학자 쓰루 시게토(都留重人)는 “한국측도 할 말이 많을 텐데 이를 예산의 세입으로 계상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일본 국회의원들도 “나중에 정말 한국에 주지 않아도 되는가”라고 정부측을 추궁했다. 한국측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 주일대표부는 1956년 2월 일본의 자산처분 조치가 강화조약 4조에 위반된다는 구상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이후의 한일회담에서 법리 공방으로 치달은 끝에 결국 청구권협상이 정치담판으로 종결되면서 봉인되고 말았다. 한일회담에서 한국측은 조선은행 재일자산이 조선은행권의 발행준비고에 해당한다면서 본점이 있는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맞서 일본측은 조선은행이 과거 일본 제국의회의 입법절차를 거친 일본 법인이라면서, 더욱이 일본인 주주의 것이라고 양보하지 않았다. 식민지 한반도의 중앙은행을 사유재산이라고 주장한 일본측이 조선은행의 한국인 지분으로 인정한 것은 겨우 1%에 불과했다.

한편, 조선은행 재일자산은 청산잔여금의 75%를 일본 정부에 납부한 후 남은 17억엔으로 1957년 4월 일본부동산은행으로 거듭났다. 조선은행의 후계회사를 자임해온 일본부동산은행은 이후 일본채권신용은행으로 은행명을 변경해 오랫동안 일본 경제의 한 축을 형성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다 1998년 이른바 버블 붕괴로 도산했다. 일본 정부는 이 은행의 빚을 갚기 위해 무려 3조2,428억엔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일본채권신용은행은 2000년 6월 재일한국계 기업인 손마사요시(孫正義)가 이끄는 소프트방크로 넘어가 아오조라은행이라는 간판을 달고 조선은행의 일본 내 명맥을 잇고 있다.

이동준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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