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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여성 징집해 전투 투입… 조종사·저격수로 공포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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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은 여성 징집해 전투 투입… 조종사·저격수로 공포의 대상

입력
2015.03.09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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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동원한 세계 전쟁, 영·미·독 보조인력으로 활용

붉은 군대 여군 100만명, 영웅 훈장 받은 여군 91명

성 역할 편견에 업적 잊혀져, 참전용사 평가도 남자와 다른 시각

2차대전 당시 전투에서 부상당한 대대장을 대신해서 전차 대대를 지휘했던 소련군 알렉산드라 사무센코 대위.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 베를린 전투에서 전사했다. 자료: '대조국전쟁, 1941-1945' (모스크바, 1987)
2차대전 당시 전투에서 부상당한 대대장을 대신해서 전차 대대를 지휘했던 소련군 알렉산드라 사무센코 대위. 종전 직전인 1945년 4월 베를린 전투에서 전사했다. 자료: '대조국전쟁, 1941-1945' (모스크바, 1987)

군복 차림에 무기를 쥐고 적과 싸우는 여자의 모습을 보고 어색하게 느끼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그러나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며 아이를 돌보는 남자가 없지 않았듯, 전투를 수행하는 여성은 지난날에도 늘 있었다. 다만 적과 싸우는 것은 여자의 일이 아니라는 고정관념이 워낙 뿌리깊은 탓에 여성 군인의 존재가 역사에서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영국의 군사 역사 대가 존 키건은 “전쟁 행위는 언제 어디서나 여성과는 거리가 멀었던 유일한 인간 행위”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가 쓴 두툼한 제2차 세계대전사에는 여군에 관한 언급이 거의 없다. 하지만 여성 역사학자 린다 드 포는 선사 시대부터 현대까지 여성은 전쟁의 역사에서 빠뜨려서는 안 될 중요한 행위 주체였다며 키건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한 여성 역사가는 이렇게 주장한다. “시대를 통틀어 가장 잘 알려진 가장 대규모 전쟁에 관해 사람들이 배워온 역사는 여성 전투원의 역할을 의도적으로 삭제해왔다.” 요즈음 역사학계에서는 전쟁과 여성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여군은 어떤 존재였을까?

일본군을 예외로 치면, 군대에서 여성은 2차대전 중 확연히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 독일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영국은 1941년 12월부터 여성을 상대로 징병제를 실시했다. 전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1943년 9월에 영국 여군은 45만명을 웃돌아 영국군의 9.4%가 여성이었다. 영국 군인 열 명 가운데 한 사람은 여자였던 셈이다. 공군에서는 여군 비율이 한때 16%에 이르렀다. 군 보조인력으로 활용되던 미국 여성도 전쟁터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싸우던 미군 부대에 타자수와 전화교환수로 여성이 투입되었다. 그런 보조 인력이 1943년에는 ‘미육군 여성부대’로 승격돼 군인 신분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독일군도 적잖은 여성을 보조 인력으로 활용했다. 1941년 말에 4만명을 밑돌던 독일 공군의 여성 보조원의 수가 1945년에는 10만명을 웃돌았다. 이 가운데 많은 이가 대공포 보조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그런 여성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군율을 적용하면서도 그들을 정식 군인이 아닌 ‘군에서 근무하는 민간인’으로 취급하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나 군복을 입은 여성을 대하는 그 세 나라 군대의 입장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여자를 전투에 투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이었다. 독일군과 미군은 말할 나위가 없고 영국군에서도 전투병과에 들어간 여군은 없었다. 전투 지역에 배치된 영국군 부대에서 근무하는 영국 여군이 적지 않았는데도, 영국은 여군의 교전 참여를 엄하게 금지했다. 전투에서 적에게 죽을 수는 있었지만 적을 죽일 수는 없는 상황에 처한 이들이 영국 여군이었던 것이다. 또한 영국 미국 독일 모두 다 군대에서 남성과 여성을 엄격히 분리하는 원칙을 고수했다. 여성 군인이 일반 부대에 분산 배치되는 일은 없었고, 여군 부대의 지휘관은 여성이 아니면 나이 지긋한 남성이었다.

소련(러시아)군의 경우는 더 흥미진진하다. 붉은 군대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여성 인력을 동원했다. 1941년 6월 22일에 독일의 기습 공격을 받은 소련 정부는 자녀 없는 여성을 징집 대상으로 삼는 법령을 공표했다. 징집 통지서를 받기에 앞서 자원해 군문에 들어서는 소련 여성이 줄을 이었다. 소련 여군은 1943년 말에 100만명에 이르렀고 정규군의 8%를 차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붉은 군대에는 여군이 없는 병과가 거의 없었다. 통신병이나 의무병은 거의 다 여성이었다. 병종을 가리지 않고 보병 포병 장갑 대공 항공 함상 부대에 여군이 배치되었다. 여성이 소총수 저격병 전차병 포병대원 항공기 조종사 등 모든 분야에서 활약했던 것이다. 영국 미국 독일과 달리 소련 여군은 보조 역할뿐 아니라 전투 임무까지 수행했다. 영국이 여성을 가장 먼저 징집한 나라였다면, 소련은 여성을 전투원으로 가장 먼저 그리고 많이 활용한 나라였다.

‘밤의 마녀들’이란 별명으로 독일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소련군 46근위 여성 야간폭격기연대의 여성 조종사들. 자료 ‘대조국전쟁, 1941-1945’(모스크바, 1985)
‘밤의 마녀들’이란 별명으로 독일군을 공포에 떨게 했던 소련군 46근위 여성 야간폭격기연대의 여성 조종사들. 자료 ‘대조국전쟁, 1941-1945’(모스크바, 1985)

그렇다면 여군은 전투에서 어떤 모습을 보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남성 못지않게 제 몫을 해내는 당당한 전투원이었다. 최전선에서 여군이 여자라는 이유로 힘든 일에서 열외되는 배려는 없었으며, 여군은 전우에게 군인으로 제대로 인정받고자 일부러 위험한 임무에 자원하곤 했다. 전쟁 기간에 훈장을 받은 소련 여군은 10만명이 넘었으며, 붉은 군대의 최고 무공훈장인 소연방 영웅 훈장을 받은 여성 전투원만 해도 91명이다.

정비병부터 조종사까지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비행연대에서 출격한 야간폭격기는 독일군 사이에서 ‘밤의 마녀’로 불릴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다. 또 다른 공포의 대상은 여성 저격병이었다. 인내심과 관찰력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뛰어나다는 사실을 간파한 붉은 군대는 여성을 저격병으로 실전에 대거 투입했다. 이들에게 목숨을 잃은 독인 군인은 모두 합쳐 1만1,280명이었다. 노나 솔로베이라는 여성 저격병은 25일 동안 독일군 1개 중대 전체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화가 타티야나 예료미나가 1942년에 그린 ‘파르티잔이여, 무자비하게 보복하라!’라는 제목의 소련 포스터. 여성 파르티잔 대원이 독일군을 직접 공격하는 모습이 담긴 유일한 포스터이다. 자료 : ‘전쟁과 승리의 포스터, 1941-1945년’(모스크바, 2005)
화가 타티야나 예료미나가 1942년에 그린 ‘파르티잔이여, 무자비하게 보복하라!’라는 제목의 소련 포스터. 여성 파르티잔 대원이 독일군을 직접 공격하는 모습이 담긴 유일한 포스터이다. 자료 : ‘전쟁과 승리의 포스터, 1941-1945년’(모스크바, 2005)

이렇듯 제1차 세계대전이 남성을 군대에 더 많이 보내고자 여성을 후방의 전쟁수행 노력에 동원한 전쟁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남성을 전투 부대에 더 많이 보내고자 여성을 군대에 동원한 전쟁이었다. 소련의 경우에는 여성이 전투원으로도 활약하며 전쟁 승리에 적잖이 이바지했다.

그렇지만 2차대전 당시 남성이 여군을 보는 눈길은 그리 곱지 않았다. 한 미해군 제독은 여군을 골칫거리로 여기며 “기회만 있다면 그들을 배에 태워 본국으로 돌려보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150명 병력의 중대에 홍일점으로 배치된 여성 기관총 사수를 받아들여야 했던 한 소련군 특무상사는 “아녀자가 사나이들 일에 끼어들면 재수가 옴 붙는다”고 투덜거렸다. 남성 참전용사의 회고록에서 ‘전투와 여자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술회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미국 항공부대에서 흑인을 전투기 조종사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백인 전투기 조종사의 반발을 일으켰듯이, 여성을 항공기 조종사로 활용하려는 소련 공군의 시도도 남성 조종사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쳤다.

군복을 입은 여성은 낯설고도 거북한 존재였다. 군대에서는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 “사나이다움”을 강조하고자 여성을 나약한 존재로 설정하고 깔보는 경향이 늘 심했다. 그런데 여자가 군대에 들어가 사나이만 할 수 있다고 여겨진 일을 해낸다면, 그런 여자의 존재는 단지 거북하다는 차원을 넘어 남성의 전통적 가치관에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은 1942년에 미국 의회에서 여군부대 창설 법안에 반대하는 한 의원의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여자를 군대에 끌어들이는 법을 가결하는 것은 용감한 우리나라 남자의 체면을 깎는 일입니다. 여자를 군대에 보내면 요리, 빨래, 살림은 누가 합니까? 미국의 남자가 도대체 뭐가 되겠습니까?”

생명을 빼앗는 것은 남자의 일이고 생명을 보살피는 것은 여자의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뿌리박힌 전통 사회에서 여성 전투원은 훨씬 더 불편한 존재였다. 조국에 쳐들어온 독일군과 싸우겠다며 전선으로 나아가는 남성 군인에게 박수와 환호를 보낸 러시아 민간인이 같은 동기로 입대해서 최전선으로 행군하는 소련 여군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당연히 남자가 해야 할 일을 하는 여자라는 존재가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여성 군인은 혐오를 사기도 했다. 영국 BBC가 만든 독소전쟁 다큐멘터리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한창일 때 자기가 독일군 포로를 심문해서 정보를 얻어낸 다음에 그 포로를 권총으로 사살했다고 증언하는 지나이다 피트키나라는 러시아 참전용사 할머니가 나온다. 다큐멘터리 진행자는 ‘당신은 살인자로 비춰질 수 있다’며 그 할머니를 걱정해준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본디 군인은 전시에 살상을 하는 사람이며, 남성 참전용사에게는 그런 우려의 말을 하지 않는다. 침략을 받은 나라를 지키려고 군인이 되어 적을 처단한 여성 군인은 남성 군인과는 사뭇 다른 평가를 받았다.

2차대전이 끝난 뒤에 여성 군인은 망각의 대상이 되었다. 전시에 흔들린 가부장적 가치관을 다시 세우려는 세력은 종전 뒤에 군복을 입은,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운 여성의 존재를 기억에서 지워냈다. 적일지라도 사람을 죽인 여성을 아내나 며느리로 받아들이기를 꺼리는 분위기 속에서 여성 참전용사가 스스로 입을 닫았다. 그러나 오늘날 역사가는 그들의 기억을 불러내어 과거를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고정관념을 깨고 지난날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밝혀내는 일은 성별에 상관없이 참된 역사가의 본분이다.

류한수 (상명대 교수, 유럽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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