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가 심화·경기지표 악화에 "임금 인상 없이 내수 못 살아나"
정부가 처음으로 우리 경제의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진입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나섰다. “디플레 가능성은 없다”고 일축해오던 지금까지의 태도와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다. 지금의 경기지표 악화와 저물가 심화를 심각한 수준으로 보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그간의 ‘증세 없는 복지’에서도 한 발 물러나 “복지확대ㆍ증세ㆍ재정부담 중 최적의 조합을 찾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4일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국가경영전략연구원의 수요정책포럼 강연에서 “저물가 상황이 이어지는 디플레 우려 때문에 큰 걱정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서민 입장에선 물가가 떨어지면 참 좋지만 지난달 물가는 담뱃값 인상분을 빼면 마이너스”라고 우려했다. 최 부총리를 포함한 정부는 그간 “최근 저물가는 유가하락 영향이 크며 디플레를 우려할 수준이 아니다”고 줄곧 강조해 왔다. 올 들어 생산ㆍ투자ㆍ소비 등 모든 경기지표들이 일제히 마이너스로 돌아선데 이어 지난달 소비자물가까지 담뱃값 상승분을 제외하는 경우 마이너스를 기록하자 정부의 인식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 부총리는 강연 후 기자들과 만나 “근원물가(농산물과 석유류 등 외부 충격에 좌우되는 품목을 제외한 물가)는 2%대를 넘어서 아직은 디플레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증세 없는 복지’ 입장에도 다소 변화가 감지된다. 최 부총리는 “연간 복지지출이 12~13% 증가하는데 세금은 2~3% 늘고 있다”며 “재정 건전성을 지키기 어렵기 때문에 증세와 관련한 국민 대타협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복지ㆍ증세 논란은) 복지수준 확대, 세금부담 증가, 재정수지 악화 중 어느 한가지만으로 해소할 수 없으며 최적의 조합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현재의 재정구조로는 복지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해석된다.
최 부총리는 이날 우리 경제가 당면한 난제들을 조목조목 강조했다. 그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 현장과 괴리된 교육 시스템이 청년층 고용난의 원인이 되고 있다”며 “청년층의 비정규직 일자리마저 감소한 최근 현실을 보면 대한민국에 미래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어 “올해 3~4월이 우리 경제에서 굉장히 중요한 달”이라며 “노사정 대타협이 이 기간에 이뤄지고, 6월 국회에서 결판이 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부총리는 또 “적정 수준의 임금 인상이 일어나지 않고는 내수가 살아날 수 없다”며 “현 정부 들어 최저임금 인상률을 연간 7%대로 올렸지만 올해도 최저임금을 빠른 속도로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경상수지 흑자 기조에 대해서도 “과도한 경상수지 흑자는 그 자체로 경제에 큰 부담이 된다”며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세종=김용식기자 jawoh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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