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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입력
2015.01.2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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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해서라면, 나는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조금쯤은 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해서보다는 분명히 그렇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머니와 딸이 아니라 엄마와 딸이라는 것! 이문재 시인은 이렇게 썼다. “어머니와 엄마는 같지 않다. 어머니가 교과서에 실린 신사임당의 이미지와 겹친다면, 엄마는 늦은 오후 저녁상을 준비하다 깜빡 졸기도 하는 중년 여자다.” 얼마 전 출간된 호원숙 산문집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의 발문 첫머리에서다.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라니. 어떤 문장은 듣는 순간 귀가 아니라 가슴에 스미는데 내겐 이 제목이 그랬다. ‘아직도’는 ‘아직’을 미묘하게 넘어서는 부사다. ‘아직도’ 뒤에는 두 가지 문장부호가 생략돼 있다. 첫 번째는 느낌표다. 어떤 일이나 상태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감탄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말줄임표다. 그 끝나지 않음이 어쩌면 앞으로도 지속되리라는 예감이 ‘도’라는 보조사 속에 은은하게 배어 있다.

호원숙 선생은 돌아가신 소설가 박완서 선생의 장녀다. 박완서 선생 생전에 두 분이 같이 계시는 모습을 가까이서 종종 뵐 기회가 있었다. 각별한 모녀 사이에 대해 흔히들 친한 친구 같다는 표현을 쓰는데 두 분 사이는 그렇게만 말하기엔 모자랐다. 단순히 친구 같은 모녀가 아니라 더 단단한 어떤 동지적 관계로 느껴졌다. 동지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아닌가. 모녀 두 분이 함께 도모하는 것은 삶 그 자체가 아닐까 나는 혼자서 감히 생각해보곤 했다.

무엇보다 호원숙 선생이 “엄마”하고 친근하게 부르는 소리가 듣기에 참 좋았다. 닮고 싶고 존경하는 대작가 박완서 선생이 사적인 영역에서는 누군가와 완전히 허물없고 편안한 사랑을 주고받는 존재라는 사실이 어쩐지 나를 안심시켰다. 선생의 4주기 밤, 나는 아직도 여전히 엄마를 엄마라 부르는 그 딸이 쓴 책을 펼쳐 읽다가 이런 부분을 발견한다. “엄마가 밝게 웃으시면 사랑이 우러난다. 사랑이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한다. 아무리 만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도 딸이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나는 마지막 문장의 ‘딸이 엄마를’을 ‘아무도 그를’로 바꿔 읽는다.

산문집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는 총 3부로 구성돼 있다. 1장은 ‘그 전’이고 2장은 ‘그 후’다. 기준이 되는 시간은 2011년 1월 22일. 우리에겐 한국 문학의 거목 작가 박완서를 잃은 날이지만 딸에게는 다만 엄마를 잃은 날이다. 1장에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 모녀의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들이 들어 있다. 딸은 엄마와 영화관에 함께 가고, 엄마 친구들의 운전기사를 하고, 봄이면 꽃시장에서 모종을 사다 심는다. 인상적인 부분은 딸로서 작가로서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하지만 어느 순간 이중적인 감정이 들 때가 있다고 솔직히 고백하는 대목이다. “내 차에 엄마를 모시고 외출할 때는 마음이 으쓱해지고 흐뭇해진다. 그러나 내 생활에서 엄마의 비중이 커질수록 나 자신에 대한 욕망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딸은 엄마가 쌓아 올린 그 높고 반짝이는 성을 넘어서거나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건 엄마의 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든 나의 성을 쌓으면 되는 거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엄마라는 큰 산을 그저 멀찍이서 바라보면서 나의 작은 언덕을 일구기 시작했다. 엄마처럼 완벽하고 쫀쫀하지는 않지만 내 문체를 갖게 되었다. 허술하고 부족하지만 내 세계를 가졌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니 이렇게 진솔하고 기품 있는 문체는 온전히 작가 호원숙 만의 것이다. 3장의 ‘고요한 자유’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만약 이 책이 위대한 작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딸의 회고담으로만 읽힌다면 좀 섭섭할 것 같다.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는 한국 사회에서 딸로 태어나 엄마로 살아가는 한 여성의 성장기이며, 세상 모든 딸들의 삶 속에 ‘외할머니 식 어리굴젓 양념’으로 스르륵 전수돼 스며들어버린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읽는 동안 자꾸 ‘우리 엄마’가 겹쳐 떠오를 것이다.

정이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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