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증=돈·명예 등식 깨져… 밥그릇 경쟁으로 진보색 부상
"이해관계 따라 분화해도 이익 수호 위해 결국 보수화"
“한국 사회에서 ‘사’자는 절대 진보화 될 수 없는 집단이다.”
‘사’자 집단의 진보화 행보에 진실성 논란이 일고 있다. 변화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일 뿐 단체 성향이 바뀔 수 없다는 주장이 학계를 중심으로 나오고 있다. ‘사’자 집단은 근본적으로는 기존 이익 수호를 위해 보수화할 수 밖에 없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다.
‘사’직업군, “우리도 어렵다”
8일 의사국가고시가 치러진 서울 한강로3가에 위치한 용산공고에는 750명의 예비 의사들이 몰렸다. 의학총론, 의학강론, 보건의학관계법규 등 3과목 평균 60%만 넘기면 의사면허를 발급받게 된다. 올해는 전국적으로 3,270여명이 응시, 예년처럼 90% 이상 합격률을 보인다면 2,900명 이상 신규 의사가 배출된다. 하지만 이날 응시자들은 걱정이 앞서 보였다. 서울의 한 사립의학전문대학원에 재학중인 이모(27ㆍ여)씨는 “의사들 처우가 과거와 너무도 달라, 합격한다고 해도 진로 고민을 다시 해야 할 처지”라고 말했다.
전문 직업종사자들은 2000년대에 들어 먹고 살기 힘들다는 주장을 심심치 않게 내놓고 있다. 더 이상 돈과 명예가 자격증 하나만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 보니 이들을 대변하는 이익단체에서 매년 내놓는 주요 의견 중 빠지지 않는 게 보수(報酬)현실화다. 1만6,900여명을 회원으로 둔 한국공인회계사회의 경우 올해 주요 사업계획으로 지난해에 이어 보수 현실화와 시장 확대를 꼽았고, 의협도 진찰료 수가 10% 인상을 추진 중이다. 의사들의 경우 돈은 안 되고 힘든 것으로 알려진 내과 레지던트(전문의) 모집 마감일인 3일에 사상 첫 미달 사태가 벌어질 정도로 처우에 민감한 상황이다.
그간 강경 보수로 분류되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가 지난해 9월 이영훈 목사가 들어서면서 중도보수로 이념적 변화를 겪은 것도 시장원리를 무시할 수 없어서다. 개신교 신자수가 10년 사이 자체 계산으로만 15만 명이 감소했다. 한기총 관계자는 “시대는 급속한 변화를 요구하고 있고 우리도 유연한 사고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며 “신앙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지만 사안에 따라 보수나 진보, 중도적인 입장을 유연하게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0년대 이후 ‘사’자 2배 이상 늘어
사자의 몰락은 인력 수급과 연관이 있다. 의사집단은 1980년대 이후 의과대학이 지속적으로 신설되면서 2002년 마침내 연간 의사 배출 3,000명의 벽이 깨졌다. 1984년에 비해 2배나 늘어난 규모다. 공인회계사도 회계 전문가 양성을 위해 2001년부터 기존보다 2배 많은 1,000명의 합격자를 매년 배출하면서 전문가 집단 중 일찍부터 ‘회계사= 자격증’이란 등식이 성립됐다.
2000년 의약분업 실행 전까진 대표적 고소득 전문직이었던 약사는 임의조제가 막히고, 약대 6년제 전환과 함께 증원이 이뤄지면서 역시 인력과잉 문제에 시달리고 있고, 한의사 역시 전국의 11개 한의과대학에서 해마다 800여명의 한의사를 배출하면서 전체 한의사는 어느덧 적정 정원을 훌쩍 넘어섰다. 대한한의사협회는 현재 시장 규모로 볼 때 한의사 숫자는 1만6,300여명이 적정하다고 보지만, 실제 인원은 1.5배인 2만3,600여명으로 불어났다. 일부 한의사는 빚더미와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 한의사협회는 “14년 사이에 개원 한의원 수가 2배 가까이 늘어나 1만3,300개에 달하면서 이젠 고소득은 불구하고 생계유지마저 어렵다는 회원들이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新-진보 舊-보수 다툼에, 단체이탈까지
기존 이익을 누리지 못한 젊은 ‘사’자 전문직들은 상대적으로 진취적이고 때론 불편한 의견까지 표출하며 집단화를 추진하기도 한다. 일부에서는 신구 세력 다툼이 일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갈등을 빚기도 한다. 청년회계사회의 경우 최근 감사인 지정제 확대를 놓고 회계사회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2011년 국내 감사제도를 문제 삼으며 조직된 이 단체는 30대 청년 회계사 위주로 활동하고 있는데, 최근 새정치민주연합과 함께 상장사, 금융사 등의 회계 감사인을 증권선물위원회에서 지정하자는 내용의 ‘주식회사 외부 감사인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주도할 만큼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이총희 청년회계사회 대표는 “기업감사를 나가보면 회계사는 자본주의의 파수꾼이 아닌 회사가 원하는 대로 감사보고서를 내놓는 을(乙)일 뿐”이라며 “회계사회가 기득권층으로 구성돼 있다 보니 문제점을 개선하지 못해 젊은 회계사들이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회계사회 관계자는 “10년이 지나면 회계법인의 파트너 회계사가 되어 고수익을 누리던 과거에 비해 힘들고 상실감이 커지다 보니 이런 의견도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비록 내부 이해관계가 맞물려 있지만 청년 회계사들의 움직임은 경제 민주화를 위한 진보적 행보로 평가된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미 내홍을 겪고 있다. 젊은 의사와 전공의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3년째 협회를 이끌던 노환규 전 회장이 지난해 4월 탄핵(불신임)을 당해 물러났다. 노 전 회장이 원격의료 시스템 시범서비스 도입을 정부와 합의한 게 탄핵의 직접 원인으로 알려졌지만 내부 신구세력 알력이 숨겨진 배경이란 게 업계의 전언이다. 원격의료는 의사가 화상통화 등을 통해 먼 곳 환자 상태를 진단하고 주기적으로 관찰ㆍ상담하며 약을 처방하는 새로운 개념의 치료 시스템이다. 하지만 개업의사들이 주도하는 의협의 상당수 회원들은 노 전 회장의 합의가 달갑지만은 않았던 셈이다. 정형선 연세대 의료복지연구소장은 “의협이 세계적인 흐름인 원격의료 시스템을 국민건강 위협이라는 명분으로 반대하고 있지만, 속내는 개인병원 수익 감소를 우려하는 것”이라며 “공익적 측면은 무시하고 이익 챙기기에만 혈안이 돼 있다”고 비판했다.
“젊은 사자도 기득권에 편승하려는 몸부림”
전문가들은 ‘사’자 집단의 변화가 기득권의 붕괴에서 오는 일시적인 과도기인지, 새로운 생각을 가진 세대의 유입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린다. 그러나 집단이 이해관계에 따라 분화하고, 그에 맞는 이념과 인물을 활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분석은 일치한다.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현재 이념 분화는 구성원들의 집합적 이익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개별 사안에 대한 내부 구성원들의 이익 추구에 따라 이뤄지고 있다”며 ‘사’자 직업군의 진보화에 대해 회의를 나타냈다. 그는 결국 “이념 과잉으로 인한 분열은 전체 단체의 이익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통합 요구가 생겨나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핵심 구성원이 산업화 세대에서 민주화 세대로 바뀌면서 이념 성향이 중도적으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며 구조적인 변화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김 교수도 ‘사’자 직업군에서 소수인 젊은이들이 급속히 새로운 주류로 확장하더라도 기존의 중산층 시각에서 벗어나는 큰 변화는 있을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박관규기자 ac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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