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안전 눈감은 성장이 부른 참사… 우리는 40여년 전과 달라졌나

입력
2014.12.27 04:40
0 0

2층 커피숍에서 가스 폭발하며 성탄절 아침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가연성 물질로 쌓아 올린 건물에 옥외비상구는커녕 안전 대책 전무

TV 생중계 탓 온 국민이 비극 목격, 7시간 태우고 163명 목숨 앗아 가

대연각호텔 화재를 취재했던 김동준씨가 서울 충무로 고려대연각빌딩 앞에서 43년 전 촬영한 사진을 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불이 났던 대연각호텔은 이후 이름을 고려대연각빌딩으로 바꿨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대연각호텔 화재를 취재했던 김동준씨가 서울 충무로 고려대연각빌딩 앞에서 43년 전 촬영한 사진을 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불이 났던 대연각호텔은 이후 이름을 고려대연각빌딩으로 바꿨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in@hk.co.kr

“오늘처럼 춥고 날씨가 좋지 않았어요. 하루 종일 흐리고 오후에는 비도 내렸지.”

김동준 전 서울신문 사진부장이 신세계백화점 건너편에 우뚝 선 고려대연각타워을 올려다 보며 회상했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듯한 매서운 칼바람이 마천루 사이를 훑고 지나갔다. 손가락이 금세라도 얼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었다. 건물의 오른쪽 측면이 보이는 곳으로 몇 걸음 옮기더니 그가 정확한 위치를 기억해 냈다. “신세계백화점 앞에 멈춘 취재차에서 내려 건물 앞으로 뛰어간 게 오전 10시 10분쯤이었을 겁니다. 도착하자마자 3층 객실 창문에 매달려 있던 한 여성이 떨어져 즉사하는 걸 봤어요. 끔찍했죠.”

1971년 12월 25일 대형 화재가 발생한 대연각 호텔이 화염에 휩싸여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1년 12월 25일 대형 화재가 발생한 대연각 호텔이 화염에 휩싸여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1년 12월 25일 토요일. 당시 서울의 유일한 번화가였던 명동은 들썩이는 성탄 전야를 보낸 뒤 조용한 휴일을 지내고 있었다. 주 6일제 근무가 일반적이던 시절 모처럼 맞은 주말 이틀 연휴의 첫날이었다. 느긋한 휴일 아침은 대연각호텔 2층 커피숍에서 프로판가스가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바뀌었다. 늦잠의 단꿈도 시커먼 악몽으로 변했다.

1969년 완공된 대연각호텔은 1971년 31층짜리 삼일빌딩이 종로에 들어서기 전까지 정부종합청사(현 정부서울청사ㆍ21층), 조선호텔(20층)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초고층빌딩이었다.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려는 정부의 야심과 맞물려 지어진 객실 수 222개의 대형 호텔로 당시로선 열 손가락 안에 드는 1급 호텔 중 하나였다.

오전 9시 50분경 일어난 불은 삽시간에 건물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나무로 만든 문과 카펫, 나일론 주단 등 가연성 물질로 가득한 건물이었기에 동남품의 바람을 등에 업은 불은 개방형 계단을 타고 손쉽게 위층으로 옮겨갈 수 있었다.

김 기자가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투숙객들이 검붉은 불길과 시커먼 연기를 피해 객실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목숨을 잃어가고 있었다. 불기둥에 깨진 유리창과 쇳조각들이 폭음과 함께 우박처럼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절한 비명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어디부터 카메라를 갖다 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아수라장이었어요.”

사진기자로 현장을 누빈 지 수년이 지난 상태였지만 그에게도 이런 큰 화재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화재 현장의 전경을 찍을 곳을 찾고 있는데 건물 동쪽 11층, 12층 창문에서 두 사람이 침대 매트리스를 잡고 탈출하려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금방이라도 뛰어내릴 것 같아 105㎜ 렌즈로 바꾸고 초점을 맞추려는 순간 12층 남자가 먼저 뛰어내렸습니다. 정신 없이 셔터를 눌렀죠. 조금 있다가 11층 남자도 똑같이 뛰어내렸는데 아래 있던 건물 옥상으로 떨어져 모두 숨졌어요.”

화재가 발생한 지 2시간도 안 돼 불길이 21층까지 치솟았을 정도로 건물이 빠르게 타올라 객실에 있던 사람들은 제대로 대처할 틈도 없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8층에서 뛰어내렸으나 약간의 부상만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고 침대 시트를 로프 삼아 내려와 구조된 사람도 있었지만 극소수에 불과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한 희생자가 늘면서 호텔 앞은 시체에서 흐르는 피와 소방차에서 떨어진 물줄기가 뒤섞여 피바다를 이뤘다.

가까스로 옥상으로 올라온 사람들을 구조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옥상으로 가는 문이 잠겨 있어 21층 스카이라운지에서 질식사한 사람이 23명이나 됐다). 옥상에 헬기가 착륙할 수 있는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조망이 아닌 구명줄로 구출하다 보니 이동 중 줄을 놓쳐 떨어져 즉사하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고층건물 화재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소방대원들이 장비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효과적으로 구조 활동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당시 현장에 투입됐던 소방대원들은 고층화재용 인명구조장비가 부족하고 인명구조대책이 미흡해서 피해 규모가 더 커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서울시내 소방차 40여대, 소방대원 600여명, 경찰과 군인 800여명, 헬리콥터 8대가 동원됐지만 바람마저 거세게 불어 불길은 손쓸 틈도 없이 건물 곳곳을 파고들었다. 박정희 대통령까지 현장에 도착해 최대한 빨리 화재를 진압하라고 지시했지만 허술한 소방 시스템이 갑자기 제대로 작동할 리는 만무했다.

고가사다리 차라고 해도 당시엔 6, 7층 정도 닿는 게 유일했기에 구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추락하는 사람들을 안전하게 받아줄 수 있는 에어매트도 없었다. 화살에 밧줄을 묶어 쏘는 방법도 동원됐지만 화살이 밧줄 무게를 이기지 못해 무용지물이었다. 한 명씩 떨어질 때마다 불구경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렀다. 대형 재난 사고로선 최초로 TV로 생중계돼 전국민이 비극의 현장을 지켜봤다.

화재는 7시간 만에 진화됐고 사망자는 163명으로 집계됐다. 2003년 2월 대구지하철 1호선 화재 사고(192명 사망)가 발생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끔찍한 화재사고였고, 호텔 화재로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부끄러운 사고였다.

대연각호텔은 1969년 완공된 후에도 건축법에 묶여 오랫동안 완공검사를 받지 못하고 있다가 건축법이 완화된 것을 틈타 화재가 나기 한 달 전인 11월 24일 완공검사를 받았다. 차고를 제외하면 스프링클러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았고 화재차단시설이나 옥외비상구도 없어 애초부터 대형화재가 나면 속수무책인 건물이었다. 건물이 다 타버리고 난 뒤 모두들 인재라고 했다.

1970년대는 화재로 얼룩진 10년이었다.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 이후 모든 건물에 스프링클러 설치가 의무화됐지만 대형건물 화재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청량리에 있던 종합상가 건물 대왕코너에선 3년 사이 세 차례나 큰불이 났는데 1974년 11월 3일 일어났던 두 번째 화재 사고 땐 무려 88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이 밖에도 파레스호텔(72년ㆍ사망 5명), 서울시민회관(72년ㆍ사망 53명), 뉴남산호텔(74년ㆍ사망 19명), 동방호텔(74년ㆍ사망 6명), 광화문호텔(75년ㆍ사망 3명), 뉴타운호텔(79년ㆍ사망 3명), 라이온스호텔(79년ㆍ사망 5명) 등 화재 사고가 잇따랐다.

경제발전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시대에 안전은 늘 뒷전이었다. 화재가 빈번하게 일어나도 건물의 소방 시설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고 정부 당국의 점검도 형식적이었다. 시대가 바뀌어도 안전의식은 크게 변한 게 없다. 사람보다 돈을 우선시하는 안전불감증은 수십 년을 거쳐 세월호 참사로 고스란히 이어질 만큼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김동준 기자가 찍은 대연각호텔 화재 사고 사진은 AP, AFP, 로이터 등 통신사를 통해 전세계 언론에 보도됐다. 압축 성장이 낳은 치부를 세계가 지켜봤다. 한국 보도사진전 특상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보도사진상을 수상했다. 자랑스러울 만도 하지만 그는 비극의 현장이 떠올랐는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건물 이름이 희한해요. 연(然)이 한자로 태우다는 뜻도 있으니까. 참 아이러니한 이름인데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네.”

대연각호텔이 불타기 전 같은 터에서 두 차례나 큰 화재사고가 있었다. 일제 땐 히라타백화점이었다가 화재로 전소됐고 한국전쟁 이후 판잣집을 허물고 가건물로 세워진 고미파카바레가 1959년 큰불로 전소됐다. 고려대연각타워로 이름을 바꾼 뒤 2010년 2월 옥상 냉각탑에서 불이 나 20분만에 진화되는 일이 있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39년 전의 참사를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다. 고경석기자 kave@hk.co.kr

당시 서울신문 김동준기자는 투숙객이 매트리스에 의지해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필사의 탈출'로 많은 상을 수상했다.
당시 서울신문 김동준기자는 투숙객이 매트리스에 의지해 빌딩에서 뛰어내리는 '필사의 탈출'로 많은 상을 수상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