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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 관리인인데…" 한마디에 왜 혹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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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 관리인인데…" 한마디에 왜 혹하나

입력
2014.12.2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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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 세탁 비용 대면 큰 이익" 뻔한 수법의 사기 올해만 10여 건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실제 존재, 막대한 이득 만든다는 '믿음' 가져

“전 대통령 형의 비자금 40조원을 현금화하는데 돈이 급하게 필요하니 1조원 상당의 수표를 100억원에 팔겠다.” 12일 자신을 목사이자 한 언론사 사장이라고 소개한 양모(67)씨는 이렇게 피해자에게 접근했다. 믿지 못하는 피해자에게 공범들은 1,000만원권 위조수표와 5만원권 위조지폐 다발, 금괴 사진 등을 보여줬다. 다행히 이들의 범행은 첩보를 입수한 경찰이 현장을 급습하면서 미수에 그쳤다. 서울 송파경찰서는 양씨 등 3명을 구속하고 공범 4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23일 밝혔다.

전직 대통령이나 친인척의 비자금 관리인을 자처하며 비자금 세탁 비용을 대면 막대한 이익을 돌려주겠다고 접근, 돈을 가로채는 사기극이 잇따르고 있다. 이런 범죄가 적발된 것은 올해 들어서만 10여건에 달한다. 9월에는 대통령 비선조직을 총괄하는 권력기관 총재를 사칭한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다. 최근에는 필리핀 마르코스 전 대통령, 인도네시아 하지 모하마드 수하르토 전 대통령 등 해외 독재자들의 비자금까지 사기에 동원되는 실정이다.

비자금 운운하는 사기꾼들은 하나같이 “5억원을 맡기면 30억원을 준다” “1억원을 투자하면 2,300억원을 1% 이하 저리로 빌려주겠다” 등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투자 조건을 내걸었다. 게다가 이런 사기 수법은 언론을 통해 수 없이 보도됐다. 그런데도 허황된 말에 속아 가산을 탕진하는 피해자들이 계속 나오는 이유는 뭘까.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베일에 싸인 권력자와 권력 집단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막연한 상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에서 정윤회씨가 비선실세로 지목돼 한바탕 홍역을 치렀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 사회는 막후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세력이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비자금 사건을 수사한 경찰들은 “피해자들이 대통령이나 청와대, 국정원 등과 연결된 비선조직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막대한 이득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그릇된 믿음을 갖고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전두환 노태우 등 전직 대통령들의 수천억원대 비자금이 실제로 드러난 것도 피해자들의 잘못된 믿음을 더 굳어지게 했다.

여기에 불법이라도 돈만 벌면 된다는 개인의 탐욕과 사회에 만연한 천민자본주의도 비자금 사기를 키우는 숙주가 되고 있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사회 지도층으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권력자들의 비자금이 실제로 드러나면서 불법적인 방법이라도 일확천금을 노리겠다는 사람들이 줄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단 사기꾼들에게 걸리면 빠져 나오기는 쉽지 않다. 사기꾼들은 권력층에 대한 막연한 상상, 탐욕을 자극하는 달변으로 피해자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이른바 ‘터널 라이트(혹은 터널 시야) 현상’에 빠뜨리는 것이다. 권일용 경찰수사연수원 교수는 “사기에 빠지면 자신이 이득을 볼 것이라는 출구만 보고 다른 것들은 확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범죄자들은 이런 심리를 악용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한다”고 말했다.

안아람기자 oneshot@hk.co.kr

서울 송파경찰서는 위조된 자기앞수표를 '전직 대통령 비자금으로 발행된 것'이라고 속여 로비자금 명목으로 수천만원을 뜯어낸 일당을 적발해 정모씨 등 3명을 구속하고 김모씨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17일 밝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송파경찰서는 위조된 자기앞수표를 '전직 대통령 비자금으로 발행된 것'이라고 속여 로비자금 명목으로 수천만원을 뜯어낸 일당을 적발해 정모씨 등 3명을 구속하고 김모씨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17일 밝혔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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