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매력적이다. 관객이 작품 속 인물에 감정 이입하기가 쉽다. 영화가 끝난 후에는 실제 사건의 전말을 찾아보며 긴 여운을 즐길 수 있다. '사실의 힘'이 작용한 결과다.
실화가 뉴스를 장식한 사건인 경우 효과는 배가 된다. 관객은 무심했던 사회문제에 대해 새롭게 보는 눈이 생긴다. 작품의 실제 주인공에게는 자신의 사연을 효과적으로 알릴 기회가 된다. 영화 '도가니'의 흥행 후 '도가니법'이 개정된 것은 실화 영화의 파급력이 증명된 좋은 사례다.
올해는 유독 '진실을 쫒는 영화'들이 많이 개봉했다. 어떤 영화들이 잊혀진 사건을 다시 도마 위에 올려놨을까. 관객을 슬픔에, 또는 분노에 빠지게 했던 실화 영화들을 모아봤다.
1. 대기업과 아빠의 싸움…영화 ’또 하나의 약속’
지난 2월 개봉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경쟁 영화들보다 현저히 적은 상영관 수에도 관객 6만명을 돌파, 조용한 저력을 보였다.
이 영화는 지난 2007년 세상을 떠난 반도체 공장 노동자 고(故) 황유미씨와 아버지의 실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황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 입사한 후 만 2년도 되지 않아 백혈병을 얻었다. 그가 숨을 거둔 후 아버지는 딸을 위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였다. 무려 7년의 시간이 지난 지난 9월, 황씨의 백혈병이 산업재해로 확정됐다. (▶기사보기)
영화는 다큐 프로그램을 연상케 할 정도로 사실적이나, 주인공 아내가 생선 다듬는 일을 했다는 등 소소한 설정은 허구다. 실제 주인공은 한 언론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영화 속 대기업에 대해 “영화는 약했다. 실제는 더 심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2. "진실이 곧 국익"…’황우석 사태’ 그린 영화 ‘제보자’
10년 전 터진 '황우석 사태'는 전 국민에게 이례 없는 충격을 안겼다. 줄기세포 배양 논문의 허위성이 밝혀지면서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에 대한 국민의 자부심은 순식간에 배신감으로 뒤바뀌었다. 온 국민이 ‘세계적인 망신’을 감당해야 했다.
당시 MBC 'PD수첩'의 한학수PD가 사건을 파헤쳤다. 그는 보도 초반 국익에 반한다는 이유로 비난 받았으나, 황 전 교수의 논문 조작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여론이 반전됐다. 6개월이 넘는 싸움 끝에 진실이 드러나면서 한PD는 PD저널리즘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기사보기)
지난 10월 개봉한 영화 '제보자'는 최근 한PD가 MBC의 인사조치로 스케이트장 운영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다시금 화제가 됐다.(▶기사보기) 작품은 진실과 국익 사이에서 신념을 추구하는 한PD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험난한 취재 과정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실제 사건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다만 한 조연출이 제보글을 인터넷에 게시했다는 설정은 사실이 아니다. 주인공 역할의 박해일이 사장 차를 붙잡고 방송 강령을 외치는 장면 또한 극적 효과를 위해 삽입된 설정이다.
3. ‘을’의 외침…비정규직 노동문제 다룬 영화 ‘카트’
영화 '카트'는 상업영화 최초로 비정규직 노동문제를 그렸다. 작품의 실제 주인공은 2007년 이랜드 계열 마트 홈에버의 비정규직 노조원들이다. 당시 이들은 부당해고에 맞서 512일 동안 파업을 진행했다. 해고자 28명 중 12명의 노조간부가 퇴사, 16명이 복직되는 반쪽짜리 성공으로 파업은 막을 내렸다. (▶기사보기)
'카트'는 비정규직 직원의 실생활을 조명해 감성을 자극했다. "우리는 반찬값이 아니라 생활비를 벌려고 나온 겁니다" "죄 없는 사람 잡아가고 돈 있는 사람 지키는 게 경찰이가" "저희가 바라는 건 큰 게 아니에요. 저희를 투명인간 취급하지 말아달라는 거예요" 등 공감을 끌어내는 작품 속 명대사도 관람 포인트.
4. ‘제 2의 도가니’되나…영화 ‘울언니’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울언니'는 영화 '도가니' '노리개'에 이어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울 작품으로 조명되고 있다. 이전 작품들이 단순히 해당 사건에 대한 실태를 드러냈다면 '울언니'는 용서와 화해의 의미를 담았다.
여대생 연서(양하은 분)는 언니를 보러 서울로 향했다가 그의 시신을 발견한다. 사건을 파헤치기 시작한 연서는 언니가 돈 때문에 성노리개로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가 범인을 용서하기로 결심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영화는 기존 사회고발적 성격의 실화 영화와는 다소 성격이 다르다. 지난달 진행된 언론배급시사회에서 이제락 감독은 "진짜 표현하고 싶었던 것은 '용서'다. 사람이 용서를 할 때는 순수하게 용서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편해지기 위해 한다는 것"이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작품이 2013년 사회적 유력 인사들에게 성접대를 하고 이들이 한 여성과 성관계 하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했다는, 이른바 ‘건설업자 별장 성접대 사건’을 연상케 하는 만큼, 성범죄 문제에 대해 생각거리를 남길 것은 분명하다. (▶기사보기) 다만 아직 개봉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울언니’가 ‘제 2의 도가니’로 부상할 수 있을지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이소라기자 wtnsora2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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