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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눈물의 비디오' 현장… 행원들 절규 맴돈다

입력
2014.11.2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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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원 대상 행원들 떠나면서도 "으뜸은행 명성 되찾아달라" 호소

지금은 옷가게·안경점 들어서

은행 인수후 '제일'상호 버리고 먹튀

1998년 1월 외환위기가 본격화하자 은행마다 뱅크런(대량 예금인출사태)이 속출했다. 당시 한 시중은행의 행원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몰려온 고객들을 응대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8년 1월 외환위기가 본격화하자 은행마다 뱅크런(대량 예금인출사태)이 속출했다. 당시 한 시중은행의 행원들이 예금을 인출하기 위해 몰려온 고객들을 응대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8년 IMF체제 당시 제일은행 테헤란로지점 퇴직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영상 '내일을 준비하며'를 찍은 이응준씨가 21일 제일은행이 있던 자리를 다시 찾았다. 테헤란지점이 있던 곳은 옷가게와 통신사가 입점했고 바로 옆 건물에는 2005년 제일은행을 인수한 스탠다드차티드 은행이 자리 잡았다. 최선아 인턴기자(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3)
1998년 IMF체제 당시 제일은행 테헤란로지점 퇴직자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영상 '내일을 준비하며'를 찍은 이응준씨가 21일 제일은행이 있던 자리를 다시 찾았다. 테헤란지점이 있던 곳은 옷가게와 통신사가 입점했고 바로 옆 건물에는 2005년 제일은행을 인수한 스탠다드차티드 은행이 자리 잡았다. 최선아 인턴기자(건국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3)

1997년 11월 21일 밤 10시, 임창열 당시 경제부총리가 정부 세종로청사에서 긴급기자회견을 열고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기업의 줄도산, 명예퇴직, 노숙자 양산, 가족 해체 등 한국 사회의 지반을 흔들어 놓은 일대 사건의 신호탄이었다. IMF가 뭔지도 몰랐던 국민에게 이후 이 세 글자는 기구의 이름이라기 보다는 사태, 환란, 기를 쓰고 벗어나야 할 어떤 것으로 각인됐다.

불과 1년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에 축포를 터뜨렸던 국민에게 IMF 사태는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 징후는 1년 전부터 뚜렷했다. 1997년 1월 30일 한보그룹이 최종 부도 처리됐고 3월 20일에는 삼미그룹이 부도가 났다. 4월 22일에는 진로그룹이, 7월 15일에는 기아그룹이, 10월 15일에는 쌍방울그룹이 줄줄이 도산했다. 10월 말 미국 신용정보회사 S&P와 무디스가 한국 국가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

11월 들어서면서 상황은 한층 긴박해졌다. 1일 해태그룹이 부도 났고 14일에는 뉴코아가 무너졌다. 유가가 치솟고 환율이 사상 처음 달러당 1,000원을 돌파하면서 위기가 TV 화면을 넘어 국민 개개인에게 현실로 다가왔다. 국고가 바닥난 것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5일 “한국 가용 외환 보유고 20억달러”라고 보도했다.

11월 23일 IMF 실무협의단이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한 이후 협상과 번복, 재협상이 이어진 결과 12월 3일 오후 7시 40분 세종로청사에서 임 부총리와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마침내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했다. IMF의 대기성 차관 210억달러에 세계은행 100억달러, 아시아개발은행 40억달러,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 7개국에서 200억달러 등 총 550억달러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실제 지원된 금액은 195억달러). 대신 한국 정부는 외국인의 기업 인수 허용, 부실은행 조기 정리, 재벌기업 계열사간 상호지급보증 중단, 경제성장률 3% 수준 유지, 군비 축소 요구 등을 받아들여야 했다. 여기에 “IMF의 경고를 무시해서 이 꼴이 났다”는 꾸지람은 덤이었다.

12월 4일 발행된 신문은 경제주권, 외세, 치욕, 신탁통치, 양보, 항복 같은 말들로 도배됐다. 캉드쉬 총재가 이회창, 이인제, 김대중 등 유력 대선 후보들에게 돌아가며 ‘자금지원 협상 이행각서’의 서명을 받아낸 것이다. 사전 협상 때는 없었던 요구들을 협상 당일 줄줄이 꺼내는 바람에 합의가 10시간이나 지연되고 임 부총리가 서명한 서류를 받아 챙기는 캉드쉬 총재의 표정이 무정하기 짝이 없었다는 등 미디어를 통해 전해진 한 마디 한 마디가 상처였고 치욕이었다. 임 부총리는 실직한 가장처럼 고개를 떨구고 “이번 기회에 강도 높은 구조조정 노력에 성공한다면 1999년부터는 정상 수준의 성장률을 회복하고 2000년부터는 국제수지 흑자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란 내용의 대국민 사죄문을 발표했다. 그러나 12월 3일은 이후 한국 사회를 집어삼킨 혹한의 첫 날이었다.

기업들 줄도산, 불어 닥친 감원 한파

12월 7일 한라그룹 부도를 시작으로 대기업들이 잇달아 도산하거나 팔려나갔다. 간신히 살아남은 곳은 강력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실직 사실을 감추기 위해 아침마다 양복을 입고 산에 오르는 중년 남성과 가정을 잃고 서울역에 나앉은 사람들의 사연이 신문 지면을 장식했다. 초등학생들도 정리해고, 명예퇴직 같은 단어를 입에 올리던 시절이었다.

감원의 한파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 테헤란로에 자리한 제일은행 테헤란지점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제일은행은 ‘조상한제서’(조흥은행, 상업은행, 한일은행, 제일은행, 서울은행)로 불리며 가장 잘 나가는 시중은행 중 하나였다. 그 중에서도 테헤란지점은 종합업적평가에서 그룹 1위를 도맡아 한 우수 지점이었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본격화하면서 은행마다 뱅크런(대량 예금인출사태)이 일어났고, IMF는 정부에 제일은행과 서울은행을 폐쇄하라고 압박했다. 정부는 일단 공적자금을 투입해 은행을 살린 뒤 외국자본에 팔겠다고 약속해 겨우 입막음을 했다.

1998년 새해 벽두, 제일은행 행원들에게는 48개 영업점의 통폐합과 그에 따른 대규모 인력구조조정이라는 청천벽력이 떨어졌다. 통폐합 대상 지점 중 실적이 우수한 테헤란지점이 포함된 것에는 상징적 의미가 다분했다. 강남 금융의 중심인 테헤란지점을 폐쇄함으로써 1조5,000억원이나 투입된 공적자금에 대해 송구한 심정을 표시하고 불타는 재활의지를 증명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희망퇴직을 받는다는 공고가 나면서 평온하던 테헤란지점은 밤낮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부부가 같이 재직 중이면 해고 대상이라더라, 승진한지 얼마 안된 이가 0순위라더라, 실적이 얼마 이하면 쫓겨난다더라 등 온갖 설이 난무했다. 시간이 지나도 희망퇴직 신청자가 나오지 않자 회사에서는 좀더 적극적인 방법을 썼다. 노란 봉투가 등장한 것이다. 출근 시 책상 위에 노란색 서류 봉투가 올려져 있으면 자리의 주인은 하루 종일 업무에 집중하지 못하고 줄담배를 피우는 풍경이 연출됐다. 봉투 안 서류에는 몇월 몇일까지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협박성 글이 쓰여 있었다. 끝까지 버티며 투쟁하려면 할 수도 있었겠지만 너나 없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혼자만 살겠다고 목청을 높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하는 것을 아직은 미덕으로 여기던 시절이기도 했다. 퇴직이 결정 난 행원들의 착잡한 심정을 담은 영상 ‘내일을 준비하며’에는 이 같은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제일은행 본사 홍보팀의 이응준씨가 직접 촬영한 영상 속 행원들은 하나 같이 담담하다. “젊음을 바쳤다” “은행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는 투정도 잠시, “남은 사람들은 잘 되길 바란다” “우리가 나가야 회사가 활력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우수한 직원들이 힘을 모아 으뜸 은행으로서의 명성을 되찾아달라”는 점잖은 축복 일색이다. 그 중 15년 간 재직했다는 한 여 행원은 “앞으로 네 일 내 일 가리지 말고 우리라는 생각으로 임해 제일은행을 꼭 일으켜달라”고 부탁하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본인의 요청으로) 모자이크 처리 된 화면 안에서 엉엉 우는 여행원의 모습 때문에 영상에는 ‘눈물의 비디오’라는 별칭이 붙었고 IMF 체제에 희생된 서민들을 상징하는 영상이 됐다.

‘눈물의 비디오’를 촬영한 이응준씨를 21일 제일은행 테헤란지점이 있던 역삼동 성지하이츠빌에서 만났다. 임 부총리와 캉드쉬가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한 지 꼭 17년 되는 날이다. 은행이 있던 곳에는 옷가게와 통신사, 안경점이 들어서 있었다. 바로 옆 건물에는 얄궂게도 2005년 제일은행을 인수한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이 입점해 있었다. 뉴브리지캐피탈로부터 제일은행을 인수한 스탠다드차타드는 SC제일은행이라는 상호를 쓰다가 2012년 ‘제일’이란 단어를 뺐다. 똘똘 뭉쳐 제일은행을 살려달라던 퇴직 사우들의 바람에도 불구, 제일은행이란 단어가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진 것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제일은행’

이 씨는 2000년 제일은행을 퇴사해 현대카드와 기업은행의 홍보부서를 거친 뒤 3년 전부터 한국미디어아카데미라는 회사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고 말했다. “영상을 찍을 때만 해도 일련의 사태들이 오래 갈 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제일은행이 재기하고 나면 ‘그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촬영했습니다.” 영상을 찍을 당시 이 대표는 입사 3년차의 파릇파릇한 청년이었다. 본사 홍보팀에서 근무하던 그는 갑자기 폐쇄 통보를 받은 테헤란지점이 제일은행의 처지를 대표한다고 생각해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을 촬영하기로 했다.

“영상을 실내에서 찍어 잘 안 보이지만 촬영 시간이 전부 밤 10~11시였습니다. 당시 제가 가장 놀랐던 건 내일 모레 나간다는 사람들이 그 시간까지 자리에 앉아서 일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딱 하루 총파업을 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투쟁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라 격렬하지 않았어요. 애절하고 점잖은 파업이었습니다.”

묵묵히 희생을 감당한 개인에게 국가가 돌려준 보상은 형편 없었다. ‘눈물의 비디오’ 주인공인 이삼억 테헤란지점 차장은 2000년 췌장암으로 숨졌고 퇴직 행원들은 낯선 요식업 판에 뛰어 들어야 했다. 영상 속 한 행원은 “제일은행이란 이름은 지금까지 나의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줬고, 회사를 나간 후에도 그러리라 생각한다”고 말했지만, 제일은행이란 이름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1999년 5,000억원이라는 헐값에 제일은행을 인수한 뉴브리지캐피탈은 5년 후 1조1,500억원의 시세차익을 남기며 제일은행을 되팔고도 한국에 세금 한 푼 내지 않았다.

“당시 은행들이 외국 자본에 헐값으로 넘어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선진금융기법 도입’이라는 문구였습니다. 선진금융이라는 것이 도입돼 이 위기를 타파할 수만 있다면 잠깐의 희생은 감내할 수 있다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죠. 서구의 선진 기법만이 살 길인 것처럼 해놓고 정작 위기는 서로 가족처럼 여기는 한국 정서로 극복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습니다.”

이 대표는 16년이 지난 지금, IMF 체제가 우리 사회에 남긴 손익을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당시 개인의 희생을 추앙만 할 것이 아니라, 그 고생을 통해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 계산해봐야 합니다. 과열경쟁, 단기실적주의, 대기업의 보신주의 외에 IMF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지.”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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