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론 발간 두 달 만에 20만부 돌파, 만화 혐한류는 100만부 넘게 팔려
日 출판계 혐한혐중 거부 움직임
헤이트스피치·배외주의에 반대, 심포·북페어 열리고 모임 결성도
지난달 하순 도쿄에서 서점거리로 유명한 간다진보초(神田神保町)의 명물서점 중 하나인 쇼센(書泉)그란데가 공식 트위터를 통해 사과성명을 발표하는 작은 사건이 있었다.
발단은 이 서점 트위터 운영자가 신간 판매를 늘리려고 일주일 전에 올린 선전문구였다. 대상이 된 신간은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재특회)’ 회장 사쿠라이 마코토(櫻井誠)가 쓴 ‘대혐한(大嫌韓)시대’라는 책이었다. 트위터 운영자는 이 책을 홍보하며 ‘이웃나라가 싫은 분, 왜 미움 받는지 알고 싶은 분이나 식민지 지배, 승전국이라는 착각, 영토문제, 반일 등에 의문을 품고 있는 분에게 추천’이라는 문구를 트위터로 날렸다.
그러자 이 서점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항의 메시지가 빗발쳤다. 신간 홍보를 위해 이같이 민족을 차별하거나 특정 국가에 대한 증오를 드러낸 문구를 사용해도 되느냐는 지적이었다. 재특회는 외국인들이 일본에서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인종ㆍ민족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아 국제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는 극우단체다.
비판이 쇄도하자 서점은 다시 트위터를 통해 “특정한 주장을 지지하는 것 같은 표현이 있었다”며 “다양한 생각을 취급하는 장소인 서점으로서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깊이 반성한다”고 공식 사과했다.
한국 증오서적 이상 판매 열기
‘대혐한시대’는 책 표지에 홍보문구로 ‘한국이 싫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왔으며 더 이상 정상이 아닌 반일 국가와는 교류할 수 없다’고 선전하고 있다. ‘비정상의 반일 바람이 불어 닥치는 한국’ ‘다케시마(竹島ㆍ독도의 일본명) 문제의 새로운 국면’ ‘재일(在日)이라는 비정상의 반일집단’ ‘새 시대를 여는 행동하는 보수운동’ ‘아시아주의와의 결별’ 등 책 목차만 봐도 일본을 비판하는 한국에 대한 비난과 자신이 이끌고 있는 재특회의 필요성에 대한 선전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쇼센그란데 서점의 사과 소동이 말해 주듯 한국에 대한 증오심을 거리낌없이 쏟아내고 민족차별적인 행동을 새로운 보수운동으로 미화하는 이런 책에 대해서는 일본 여론도 따가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소동도 한몫을 해 지금 이 책은 일본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베스트셀러다. 9월 하순 출간 직후부터 일본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몇 주 동안 1위를 차지했고 지금도 3위에 올라 있다.
일본에서는 지난해부터 한국에 대한 혐오감, 중국에 대한 증오를 그대로 드러낸 혐한혐중(嫌韓嫌中) 책들이 기세 좋게 팔리고 있다. 아사히신문의 올 초 보도에 따르면 당시 주간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런 책들이 세 권이나 들어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한국을 논한다는 뜻을 담아 산케이신문 출판부에서 낸 ‘망한론(茫韓論)’이라는 책은 지난해 말 발간돼 두 달 만에 20만부를 돌파했다. 2005년 처음 나와 시리즈물로 이어지고 있는 ‘만화 혐한류’는 100만부가 넘게 팔렸다. 올해 상반기 논픽션 부문 주간베스트셀러에는 ‘한국인이 말하는 치한론(恥韓論)’ ‘범한론(犯韓論)’ 같은 혐한 서적이 10위권에 무려 7종이나 들어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혐한서적 주요 독자 60세 이상 장ㆍ노년층
마이니치신문이 최근 일본 전국의 16세 이상 2,400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독서여론조사에서 혐한혐중 서적이나 잡지의 관련 특집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는 사람은 13%인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60세 이상이 45%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10대 후반은 3%, 20대는 8%였다. 혐한혐중 책이나 잡지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읽지 않았다는 사람들에 비해 역사나 지리 관련 책을 좋아하고, 주간지도 즐겨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책들이 잘 팔리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복수로 답한 전체 응답자 중 49%는 한일ㆍ중일 관계를 나쁘게 한다고 봤다. 한국이나 중국에 대한 불안이나 불만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30%, 이런 책이 팔린다는 것이 한심하다가 18%, 일본에 대한 불안이나 불만의 배출구 되고 있다는 응답이 17%를 차지했다. 자유 의견으로는 ‘한국, 중국이 더 심한 반일 기사를 쓰고 있으니 반격해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국가 대 국가의 문제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기사로 차별이 일어난다’는 비판이나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는 반응도 있었다.
일본 출판과학연구소 사사키 도시하루 주임연구원은 이 조사 결과에 대해 “혐한혐중 책은 고정 독자층이 구입하고 있는 것 같다”며 “비슷한 책이 잇따라 나오고 있지만 독자가 한정돼 있어 밀리언셀러가 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숨죽였던 차별의식 한일 냉각 기화로 불거져 ”
밀리언셀러가 나오기 힘들다는 말은 맞을지도 모르지만, 일본 출판계에서는 최근 1년 사이 이런 책을 내기만 하면 수만 부, 조금 바람을 타면 수십만 부 팔린다는 통념이 굳어져 가는 게 사실이다. 양서(良書)의 보급을 추구한다면 내지 말아야 할 이런 책들이 시류를 타고 팔리다 보니 출판계의 고민도 깊어진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단행본과 잡지 편집자, 필자들이 모인 일본출판노동조합연합회(출판노련) 회원들은 지난 5월 하순 서점 직원을 대상으로 한국, 중국을 비난하는 책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잘 팔리는 책은 주문해서 팔지 않으면 안 된다”는 현실론과 “(혐한혐중 책은)누군가를 공격하고 싶다는 욕망을 선동한다”며 “(상대를)이해하려 노력하기보다 그쪽이 훨씬 편하고, 기분도 좋고, 자신들만 훌륭한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비판이 엇갈렸다.
이 같은 책을 내거나 파는 것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 일부 출판인들이 행동에 나설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출판노련은 지난 7월 도쿄에서 ‘혐중혐한 서적과 헤이트스피치’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기조강연에 나선 사람은 기고가 가토 나오키(47). 그는 간토(關東)대지진 후 도쿄에서 뜬소문으로 한국인, 중국인이 대량학살 당한 것을 지진 발생 때부터 시간 순으로 기술한 ‘9월, 도쿄 거리에서’라는 책을 올 초 출간해 반향을 일으켰다.
가토는 이 자리에서 “퇴근 길 석간 신문에서 한국을 나쁘게 묘사하는 기사를 읽고 기분전환하는 데 익숙해져 가는 지금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의 앞에 서 있다”고 말했다. 그는 “90년 전 사건(간토대지진 학살)이 지금의 인종차별과 연관돼 있다고 생각했다”며 “(자신의 책을)읽은 독자들도 ‘이것은 옛날 일이 아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가토는 일본인들의 내면에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던 민족차별 의식이 과거사문제 등을 둘러싸고 한국, 중국과 관계가 좋지 않은 지금 다시 불거져 나오고 있다고 해석했다.
혐한혐중 거부 움직임 서서히 확산
지난 5월 출판사 가와데쇼보우신샤(河出書房新社)의 20, 30대 직원 네명은 다양한 장르의 책을 모아 ‘지금, 이 나라를 생각한다-‘혐(嫌)도 아니고 망(茫)도 아닌’을 부제로 ‘지금 읽어야 할 책’이라는 도서 기획을 선보였다. 저명인사 19명에게 지금 일본을 성찰하기 위해 좋은 책을 추천받아 18권을 소개한 것이다. 이 중에는 아쿠타가와상 수상 작가인 히라노 게이치로(平野啓一郞)가 고른 김항 고려대 연구교수의 ‘제국 일본의 문턱’이나 일본 언론인 야스다 고이치(安田浩一)의 ‘헤이트스피치란 무엇인가’ 같은 책들이 포함됐다.
이들의 제안에 호응해 이 제목을 달고 기획 코너를 만든 서점이 일본 전국에서 200곳을 넘었다. 참가 서점 중에는 이름난 대형서점인 기노쿠니야, 쥰구도, 마루젠 등도 있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마루젠 나고야 사카에점 부점장은 “서점은 다양한 책이 있는 곳”이라며 “한국, 중국 비판에 치우친 책에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던 참인데 이런 기획 안내가 왔다”고 반겼다. 중소출판사 모임인 ‘한겐(版元)닷컴’도 ‘반헤이트스피치’를 제목으로 한 또 다른 북페어를 11개 출판사 26권의 책으로 인터넷에서 진행했다.
지난 3월에는 페이스북 등을 통해 혐한혐중 서적의 인기는 문제라는 데 공감한 젊은 출판인 약 20명이 모여 ‘헤이트스피치와 배외주의에 가담하지 않는 출판인 모임’을 결성했다. 모임을 주도한 이와시타 유(岩下結)는 아사히 인터뷰에서 “이런 상황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며 모임을 이런 비판 흐름을 만들어 가는 “신호탄으로 삼고 싶다”고 말했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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