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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정권 끝장 낸 극적인 장소, 그 앞엔 지금 세월호 농성 천막이...

입력
2014.10.24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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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으로 위기에 몰린 정권...중정부장이 대통령 저격 막내려

박정희 말년 궁정동서 잦은 연회..."내부에서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안가 1993년 헐리고 공원으로...작은 비석外 흔적도 없이 사라져

김재규(오른쪽 위)가 10·26 사건 현장검증에서 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총으로 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재규(오른쪽 위)가 10·26 사건 현장검증에서 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총으로 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전가옥은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1993년 3월 헐리고 그 자리에는 시민공원 무궁화동산이 들어섰다.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의도였지마 어두운 역사를 기억할 장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김주성 기자 poem@hk.co.kr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전가옥은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1993년 3월 헐리고 그 자리에는 시민공원 무궁화동산이 들어섰다.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의도였지마 어두운 역사를 기억할 장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김주성 기자 poem@hk.co.kr

“한 발의 총성으로 / 그가 사라져간 그 날 이후로 / 70년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지 / 수많은 사연과 할 말을 남긴 채”(신해철 ‘70년대에 바침’)

1979년 10월 26일 오후 7시 40분쯤 서울 종로구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총성이 울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했다. 신해철의 노랫말대로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1970년대는 막을 내렸고 역사의 흐름은 요동쳤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다. 그러나 그 배경을 살펴보면 박정희 유신 정권이 이미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었다.

사건 열흘 전인 10월 16일 부산과 경남 마산을 중심으로 대규모 유신 반대 시위가 있었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박탈이 기폭제가 됐다.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으로 대응했지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부마민주항쟁 현장을 보고 유신 정권이 큰 위기에 빠졌다는 인식을 하게 됐다. 엄혹한 유신 체제에서 재야 정치가, 지식인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민주화 운동에 시민과 노동자가 적극 동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박정희는 여전히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내가 아니면 한국을 이끌 수 없다”는 대통령의 뒤틀린 자기확신과, 정치에 사사건건 개입하던 경호실장 차지철의 권력욕이 맞아떨어졌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살해, 김영삼 제명, 부마항쟁 대응에 있어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온건한 대응을 건의했으나 박정희는 강경한 입장을 제시하는 차지철의 손을 들어줬다. 사건 당일 벌어진 술자리에서도 박정희는 차지철을 옹호하며 김재규의 미온적인 태도를 질타했다. 김재규는 야당과 ‘불순세력’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한 중앙정보부장 취급을 받았다. 차지철에 의해 권력에서 밀려날 것이라는 개인적 불안감과, 유신 정권의 불안한 정치적 상황에 고민하던 김재규는 결국 “대통령을 죽이면 국민이 환영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궁정동 안가에서는 크고 작은 술 자리가 열렸다. 그 자리에 여성 연예인이 함께 하기도 했다. 말년의 박정희가 아내 육영수의 사망 이후 정신적으로 흔들렸다는 증거로 궁정동의 잦은 연회가 언급된다. 궁정동 행사는 밖에서 볼 때는 철옹성처럼 견고했지만 보이지 않는 내부에서 흔들리고 있던 유신 정권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김재규도 이 연회를 기회로 삼았다. 군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궁정동의 다른 건물로 초대했다. 이로 볼 때 김재규는 이 날 중요한 누군가를 살해하기로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박정희가 애초부터 그 대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날 박정희는 차지철의 면전에서 김재규를 질타했고 이는 그가 박정희를 죽일 결심을 굳히게 했다. 김재규는 심복인 박선호와 수행비서 박흥주 대령에게 안가를 장악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권총을 들고 연회장으로 들어가 차지철과 박정희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김재규는 부하들에게 후속 처리를 명령한 후 정승화와 함께 안가를 나섰다. 남산에 위치한 중앙정보부와 용산의 육군본부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김재규는 육군본부로 가야 병력 동원이 용이하다는 정승화의 조언에 따랐다. 이는 김재규의 가장 큰 오판이자 그가 계획 없이 대통령을 살해했다는 증거로 널리 언급된다. 결국 김재규는 박정희의 죽음을 인지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명령으로 체포됐고 이듬해 재판 끝에 내란목적살인 및 내란수괴미수혐의로 사형 판결을 받았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한 것이 우발 행동이었다는 판단이 아직까지 우세하다. 그가 권력욕에 휩싸여 박정희를 살해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김재규의 의도가 어떻든 10ㆍ26은 분명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긴 사건이었다. 부마민주항쟁이 권위주의 정권 내부의 온건파로 하여금 정권을 붕괴시키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10ㆍ26 사태 이후 서슬 퍼런 긴급조치가 일거에 해제되고 야당의 유력 인사들도 정치현장에 복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박정희의 죽음으로 형성된 권력 공백은 1980년 ‘서울의 봄’의 참여자들이 정치적 상황을 지나치게 낙관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수뇌 세 사람을 한번에 잃어버린 유신체제의 상층부를 장악한 후 5ㆍ18 광주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군사정권을 8년, 노태우 대통령 집권기까지 포함하면 13년 연장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모두 군사정권의 잔존 세력들과 연합해서야 대통령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사건의 현장이었던 궁정동 안가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헐리고 그 자리에는 작은 공원인 무궁화동산이 들어섰다. 소수에게 집중된 권력으로 체제를 유지해 온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자는 의도였다. 무궁화동산의 건립 취지를 적은 비석이 있지만 역사의 현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몇몇 사진과 기록만으로 그 날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무궁화동산은 산책 나온 동네 주민, 청와대와 경복궁을 구경 온 관광객 그리고 수업을 마친 인근 학교 학생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그러나 동네에서 오래 산 주민 말고는 35년 전 사건이 바로 이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대신 근처 어디선가 총격사건이 있었다고 막연하게 짐작할 뿐이다. 무궁화동산에서 큰 길로 걸어나오면 청운효자동주민센터가 있다. 그 앞에는 지금 세월호 유족의 농성 천막이 설치돼 있다. 올해 5월 KBS 노조원 등이 청와대의 부당 간섭 중단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한 곳도 바로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이었다.

인현우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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