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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맞닥뜨린 친정 엄마의 치매 가족 안에 잠복한 균열 예리하게 포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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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맞닥뜨린 친정 엄마의 치매 가족 안에 잠복한 균열 예리하게 포착

입력
2014.10.21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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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 ‘늑대’,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 등이 있다.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매향(埋香)’ ‘국경을 넘는 일’ ‘늑대’,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 등이 있다.

늙음은 서서히 찾아온다. 발견되는 즉시 내몰릴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한밤의 도둑처럼, 사랑 받아본 적 없는 고양이처럼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찾아 드는 것이다. 그러니 불시에 달려든 늙음에 우리가 놀라는 건 당연하다. 마치 교통사고를 목격한 사람들처럼 벌어진 입을 손으로 가리고, 서로 급하게 눈빛을 부딪으며, 감히 어떤 위로의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늙음을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전성태의 ‘소풍’은 가족의 단란한 한때를 그리고 있다. 어버이날을 맞아 처갓집을 찾은 세호네 가족은 인근 공원으로 소풍을 떠난다. 뒷좌석 외할머니의 양 옆으로 앉은 아이들은 네잎 클로버를 찾을 생각에 가슴이 부풀었다. 딸아이의 노랫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우지만 세호와 아내 지현의 속은 편치만은 않다.

전날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세호는 피로와 숙취 때문에 어디든 박혀 잠이나 자고 싶지만, 왜 그리 처가를 싫어하느냐는 아내의 바가지가 두려워 입을 꾹 다물고 있다. 지현은 만석인 주차장과 꽉 막힌 차도 때문에 신경이 날카롭다. 실은 잦은 해외출장 때문에 가정에 소홀한 남편이 신경증의 진짜 원인인지도 모른다. 지난해 뇌경색을 앓은 후 움직임이 둔해진 팔순 장모는 무던한 사람이다. 딸의 신경질에도, 사위에게서 풍기는 술 냄새에도 가타부타 말이 없는 그는 손주들의 재롱에 그저 엷은 미소를 띨 뿐이다.

주차 자리를 찾자마자 차에서 튀어나와 초원을 내달리는 아이들을 보며 세호는 그제야 긴장의 끈을 푼다. “저렇게 드라마 한 장면 같은 풍경이면 족했다. 저것 한 컷 건지려고 새벽부터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왔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다섯 시간 분량의 구질구질한 필름을 버리고 손을 터는 사람처럼 마음이 산뜻해졌다.”

아이들의 높은 웃음소리로 채색된 세호네 가족의 홈 드라마에는 중간중간 장모의 뜻 모를 소리가 불협화음처럼 끼어든다. 얼마 전 돌아가신 사돈어른의 안부를 아무렇지 않게 묻는 모습이나 그에게서 희미하게 풍겨 나오는 오줌 냄새에 부부는 이상한 낌새를 감지하지만, 공들여 만든 아름다운 장면에 먹구름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노인네들은 종종 그래” “요실금이야, 오래 전부터 앓고 있는.”

네잎 클로버를 찾지 못하고 우는 딸애를 달래기 위해 보물찾기가 시작되고, 장모가 숲 속에 숨긴 지폐를 아이들은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못 찾겠어요.” 힌트를 달라며 아이들이 성화를 부리지만 노인은 말이 없다.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가며 고개만 갸우뚱거리는 노인을 부부는 침묵 속에 지켜본다. 점차 사색이 돼가는 장모를 보다못해 그만 가자며 붙드는 세호에게 지현이 소리를 빽 지른다. “어디를 가? 꼭 찾고 가. 엄마, 꼭 찾아. 잘 기억해봐.” 아내는 자리에 주저 앉고, 장모는 울상이 되고, 단란한 소풍은 박살이 난다. 세호는 가족을 이끌고 숲을 빠져 나가며 거듭 말한다. “괜찮아요, 장모님. 아무 문제 없어요.”

문학평론가 백지연은 ‘소풍’에 대해 “하나의 표피가 아닌 여러 개의 껍질로 겹겹이 둘러싸인 삶의 복합성을 수려하게 묘사한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소풍이라는 화사한 풍경의 이면에서 점점 치매가 진행돼가고 있는 모습을 긴장감 있게 그려냈다”며 “보물찾기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 삶의 진실은 표면이 아닌 우리가 잊고 있는 어두운 곳에 처박혀 있을지 모른다는 메시지가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전성태 작가에 대해서는 “원래 리얼리스트 계열의 작가로, 사회적 문제를 주로 다뤄왔는데 이번 소설을 통해 일상에 잠복한 균열들을 포착하는 데도 비상한 능력이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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