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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죄의 계절...비틀대며 건너는 남자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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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죄의 계절...비틀대며 건너는 남자와 여자

입력
2014.10.1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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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악행을 목격했을 때 우리는 분노와 함께 ‘왜’라는 질문에 사로잡힌다. 언론은 전문가들을 들쑤셔 ‘왜’에 답하게 하고, 전문가들도 자못 진지한 자세로 ‘왜’에 대한 소견을 피력한다. 마치 뿌리를 드러내는 것만으로 나무는 반쯤 뽑힌 거라 믿는 듯. 이럴 때 악은 뿌리를 가진 나무의 형태가 아니라고 참견하는 건 금물이다. 뿌리에서 줄기로 이어지는 착실한 인과관계가 아닌, 바이러스나 포자처럼 잠복했다가 적당한 계절을 만나면 스스로 발아해 창졸간에 모습을 드러내는 그들의 생태는 가급적 밝혀져선 안 되는 비밀이다.

백민석의 ‘수림’은 지리한 장맛비를 양분 삼아 도시 곳곳에서 비밀스럽게 발아하려는 죄의 씨앗들을 포착한다. 남자는 이혼한 홀아비다. 팬티 열 장으로 한 주를 버티던 그는 열흘 넘게 이어지는 장마에 빨래를 포기하고 팬티를 추가로 산다. 그가 여자를 만난 건 구청에서 운영하는 자원봉사센터에서다. 처음 모임에 나온 날 여자는 자신을 삼십 대 초반의 주부라고 소개하기 무섭게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는다. “남들은 제가 이러면 무슨 문제가 있나 그러시는데 아무 문제도 없어요.” 어느 날 문득 과거의 사소한 실수들이 떠올라 밤낮으로 울기 시작했다는 여자는 남을 위해 일하면 마음이 가벼워질까 싶어 모임에 나왔다고 고백한다.

꼬장꼬장한 노친네의 집을 고쳐주다가 쥐똥을 뒤집어쓴 계기로 가까워진 두 사람은 그날 저녁을 함께 먹는다. 맥주 한 잔 하자며 조르는 여자에게 남자가 말한다. “연주 씨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요.” “연주라니까요, 그리고 오빠도 내가 누군지 모르잖아요.”

이후 여자의 일방적인 문자 세례가 이어지지만 딱히 죄책감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언젠가 남자와 여자, 여자의 남편까지 셋이 식사를 하게 된 자리에서 남편은 그를 형님이라 부르며 아내를 잘 부탁한다는 기이한 청탁을 했기 때문이다.

남자는 중학교 1학년생 아들과의 나들이에 여자를 동행시킨다. 아들을 만날 때마다 몰래 따라와 감시하는 아내가 신경 쓰이지만 설마 교외까지 따라올까 싶다. 카페에 앉아 재잘대는 아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멀리서 이쪽으로 빠르게 걸어오는 아내의 모습이 보인다. 노여움과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아내의 눈. “도대체 당신 왜 그래?”

남자는 아내를 발코니로 데리고 나가 여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만났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나 아내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기만 한다. “그런데 왜 애 앞에서 만나냐고!”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귀를 막지만 그 높은 목소리를 피할 길이 없다.

장마가 끝나고 쌀쌀해진 계절, 집수리 현장에서 다시 만난 여자에게 남자는 여상한 척 말을 건넨다. “내가 얼마나 끔찍한 사람인지 이제 좀 알지 않았어?” 빙긋 웃는 여자로부터 온 문자 한 통. “끔찍한 걸로 따지면 내가 더 끔찍할 걸 ㅋㅋ 확인하고 싶다면 조만간 기회가 있을 거야 ^^”

‘수림’은 10년 간의 절필을 끝내고 지난해 작품 활동을 재개한 백민석 작가의 단편이다. 계급 문제를 포함해 사회의 모순과 폐해에 국내 작가들 중 가장 극렬한 분노를 뿜었던 그를 두고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한국 문단의 분노자본”이라는 별칭을 붙였다. 그는 “10년 전의 백민석이 그야말로 폭주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폭력을 다스리려는 일련의 시도가 엿보여 흥미롭다”며 “자기 안의 괴물을 마치 장마처럼 시간이 지나면 견딜 수 있는 무엇으로 믿고 싶어하지만 결국엔 실패하는 남자의 모습을 통해, 여전히 강렬하고 파괴적인 작가의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고 평했다.

황수현기자

백민석 1971년 서울 출생

1995년 계간 ‘문학과사회’에 ‘내가 사랑한 캔디’를 발표하면서 등단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내가 사랑한 캔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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