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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대교 붕괴 20년… 여전히 악몽 꾸는 '생존자'

입력
2014.10.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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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재씨 "아직도 다리 지날 때 악몽...

정부가 대형사고 후유증 책임져야"

1994년 경찰의 날 賞받으러 가는 길

승합차 양옆 아스팔트 하늘로 치솟아

꼬꾸라진 버스에선 비명...아비규환

차 막히면 고통... 집은 1,2층만 고집...

천운에 살았지만 갈수록 후유증 더해

"아스팔트 위 세월호 유족들이 걱정"

성수대교 붕괴사고 생존자인 이경재(41)씨는 “성수대교는 당시 의경으로 복무하면서 이틀에 한 번 꼴로 운전하며 오갔던 다리”라며 “사고 때를 생각하면 주뼛주뼛 머리칼이 선다”고 말했다. 이씨가 성수대교 북단 아래서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hk.co.kr
성수대교 붕괴사고 생존자인 이경재(41)씨는 “성수대교는 당시 의경으로 복무하면서 이틀에 한 번 꼴로 운전하며 오갔던 다리”라며 “사고 때를 생각하면 주뼛주뼛 머리칼이 선다”고 말했다. 이씨가 성수대교 북단 아래서 사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sssh@hk.co.kr

“나는 캡~이었어. 그저 시킨 대로 하지만 그건 난 아냐~”

라디오에선 신나는 가요가 흘러나왔다. 김진우의 노래였다. 날은 흐렸다. 그래도 기분 나쁠 일 없는 아침이었다. 서울경찰청 제3기동대 40중대 소속 수경으로서 표창을 받으러 가는 길. 잘 다리고 닦은 기동복과 군화도 갖췄다. 49주년 경찰의 날, 좋다면 좋은 시작이었다. 함께 표창을 받으러 가는 차 안의 동료 10명도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불렀다.

승합차는 성수대교를 달리고 있었다. 장안동에 있는 중대에서 개포동에 있는 대대까지 가려면 건너야 하는 다리다. 운전병인 내겐 아주 익숙했다. 입대 이래 2년 간 이틀에 한번은 차를 몰고 건넜으니까. 오늘은 표창 수상자라고 운전대를 잡지 않은 게 다행인 걸까.

오전 7시 38분 무렵, 다리 가운데쯤 이르렀을 때다. 순간 느낌이 이상했다. “브레이크 잡아!!” 나도 모르게 다급하게 소리쳤다. 차 양 옆의 아스팔트가 하늘로 치솟았다. ‘이게 무슨 일이지?’하는 찰나, 정신을 잃었다.

깼을 때 주위는 적막했다. 눈을 떴는데도 꿈인 것 같았다. 상황 파악이 잘 되지 않았다. ‘차 옆에 왜 물이 보이나.’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 앞에 있었다. 알고 보니, 땅이 솟은 게 아니라 차가 꺼진 거였다. 다리 상판 조각과 함께. 머리 위에 흉물스럽게 찢겨 속살을 드러낸 성수대교가 보였다.

정신을 차리고 승합차 밖으로 나왔을 땐 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앞에 16번 버스가 고꾸라져 있었다. 뒷자리 차창 밖으로 여성 세 명의 머리칼이 보였다. 여기저기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구할 수 있는 대로 사람들을 끄집어내고 건졌다. 부상자들의 저체온증이 걱정됐다. 차 안에서 꺼낼 수 있는 헝겊이란 헝겊은 다 동원해 덮었다. 어느새 우리도 속옷만 입은 채였다. 정신 없는 아비규환의 시간이 흐르고, 멀리서 119보트와 경찰 구조선이 보였다.

이날 살아남은 사람은 사고를 당한 49명 중 17명뿐. 이마에 상처만 낸 채 생존한 내겐 너무도 다행인 날이지만 가장 기억하기 싫기도 한 날, 바로 1994년 10월 21일이다.

이경재(41ㆍ위자드LED 대표)씨가 기억하는 성수대교 붕괴사고다. 그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머리가 주뼛주뼛 선다”고 했다.

겉으로 보면 말짱하다고, 천운이라고 하겠지만 그의 속은 전혀 아니다. 처음 얼마간은 이씨도 스스로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고 후 5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며 “스스로 괜찮다고 다독이며 이겨내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생각하지 못한 후유증이 밀려왔다. 키 187.5㎝에 건장한 체격의 이씨는 다리건 건물이건 높은 곳에 잘 가지 못한다. 사고 후 겪는 가장 힘든 일이다.

“차로 다리 건널 때가 가장 고통스러워요. 만약 어쩔 수 없이 건너야 하면, 가급적 바깥 차로를 택합니다. 가운데 차로일수록 완충 때문에 다리가 흔들거리는 느낌이 강하거든요. 다리 위에서 차가 막힐 때가 가장 괴로워요. 차를 돌려서 반대편으로 도망가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습니다.”

집도 고층은 피한다. 어느 새 그는 늘 1층 또는 2층에만 산다. 지금 사는 곳도 1층이다. 사고 이후 놀이기구를 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한다. 조명 인테리어 사업을 하는 터라 때론 높은 곳에 올라가 작업 현장을 봐야 하는 일도 있지만, 그러지 못한다.

“생각해보세요. 누가 ‘내가 지금 건너는 다리가 무너진다, 살고 있는 집이 주저 앉을 거다’라고 상상하겠어요? 그런데 그때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고, 겪은 거죠. 처음에는 이 정도로 후유증이 점점 커질 줄 몰랐습니다.”

그가 사고 후 받은 조치로 기억하는 건 경찰병원 입원 치료와 7~10일쯤의 휴가가 전부다. 보상금도 받지 못했다. 그러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이씨는 “심리치료나 상담은 들어보지도 못했다”며 “사고 후 어떻게든 잊으려고 노력하면서 ‘나는 괜찮다’고 되뇌었는데 이겨낸 게 아니었고 혼자선 이겨낼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과 생존자가 유달리 걱정이 되는 건 그래서다. 이씨는 “수년 간에 걸친 장기적인 치료를 정부가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지금 사고를 겪은 당사자나 가족은 치료를 거부하거나 ‘이젠 됐다’며 기피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들을 설득해서 지속적으로 치료를 받게 해야 합니다. 그것도 정부가 할 일이죠.”

자신이 그런 사후 조치를 받지 못했고, 후유증을 겪고 있는 터라 그의 말은 더 절절하다.

그런데 지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심리 치료는커녕 사고 원인을 제대로 밝힐 법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느라 아스팔트에 서는 일이 더 많다. 이씨는 “정부가 가족들의 의견을 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고 후 또 하나 크게 달라진 게 있다. 바로 가치관이다.

“운명은 내가 정하는 게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사고 전에는 늘 미래를 꿈꿨어요. ‘나중에 뭘 해야겠다’는. 그런데 사고 후에는 현재에 집중해요. 지금 이 순간을 재미있게 잘 살자는 생각이지요.”

김지은기자 lun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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