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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중심 보편적 역사 서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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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중심 보편적 역사 서술은 어떻게 가능한가

입력
2014.10.10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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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유럽을 지방화하기'

디페시 차크라바르티 지음ㆍ김택현 안준범 옮김

그린비 발행ㆍ512쪽ㆍ2만9,000원

유럽을 표준 삼는 역사주의는

다른 지역의 독자성 이해에 한계

근대의 기준에서 벗어난

민초들의 삶과 의식 제대로 못봐

지난 2000년 출간된 이래 많은 화제를 불러온 역작 ‘유럽을 지방화하기’의 저자 디페시 차크라바르티는 1980년대 초 일군의 인도 역사가들이 시작한 서발턴 연구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다. 서발턴(subaltern)이라는 말은 원래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사회의 하층 계급을 가리켜 사용했던 말이다. 그런데 서발턴 역사학자들은 이 용어를 일반화하여 엘리트 집단 이외의 모든 인도인, 곧 종속적인 사람들 일반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했다.

서발턴 역사학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나타낼 만한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민초들의 역사를 그들의 관점에서 서술하려는 급진적인 기획이었다. 라나지트 구하의 ‘서발턴과 봉기’가 이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구하는 19세기 인도 농민 봉기를 주도했던 서발턴 농민들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그들을 인도 역사의 주체로 새롭게 세우려고 했다. 일종의 민중사 기획인 셈이다.

그런데 가야트리 스피박이 ‘서발턴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구하는 역사란 본질적으로 재현적인 성격을 띤다는 것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구하가 들려주는 서발턴의 목소리는 역사가로서 구하가 설정한 틀에 따라 재현된 것이며, 진짜 서발턴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발턴은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는 여전히 문젯거리로 남게 된다.

차크라바르티는 이 책에서 서발턴과 재현의 문제를 좀더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이번에는 역사라는 것의 성격 자체가 문제가 된다. 그는 역사주의라는 개념을 통해 이 문제에 접근한다. 그에 따르면 역사주의는 “모든 연구 대상은 그것이 실존하는 내내 통일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세속적, 역사적 시간의 발전 과정을 통해 충분히 표현된다고 생각하는 역사에 관한 사유 양식”을 뜻한다. 쉽게 말하면, 이것은 세계 전체는 동일한 역사적 패턴에 따라 발전해왔고 또 계속 발전해간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가 역사주의를 문제 삼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역사주의야말로 유럽의 식민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는 통찰이다. 역사주의를 특징짓는 것은 “먼저 유럽에서, 나중에 다른 곳에서”라는 구조다. 곧 산업화와 민주주의, 시민권, 인권 등이 먼저 유럽에서 생겨났으며, 유럽을 제외한 아시아,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에서는 유럽이 이룩한 선진 문명을 뒤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유럽은 세계의 모든 문명이 뒤따라야 할 표준 모델을 제공해주는 셈이다.

둘째, 역사주의는 서발턴 역사의 문제의식을 관철시키는 데 근본적인 장애물이라는 생각이다. 그는 캘커타 공장 기계 노동자들의 예를 든다. 이 노동자들은 매년 가을마다 염소를 제물로 바치는 종교 의례를 지낸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역사주의적 관점에 따르면 이는 전(前)근대적 의식의 흔적이다. 곧 기계가 잘 가동되도록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발적인 사고에 대처하기 위해 일종의 보험을 드는 행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평가는 이 노동자들의 의식과 생활에 늘 함께 하는 신성(神聖)을 전근대적이고 미신적인 것으로, 따라서 사라져야 하고 세속화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 노동자들이 지닌 의식과 믿음, 생활은 이미 역사주의적 틀 바깥으로 배제되어 버린다.

이 사례는 구하가 분석했던 19세기 인도 농민 봉기의 사례와 곧바로 연결된다. 농민 봉기 당시 어떤 농민들은 봉기는 자기들이 직접 일으킨 것이 아니라 타쿠르라는 신이 명령한 것이며, 그 신이 직접 싸움에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하는 이들의 의식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되살리려고 노력하면서도 이것을 “그들에게 진리인 것”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역사가 구하와 서발턴 농민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서발턴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역사주의를 포기하고, 거기에 입각한 역사학이라는 분과학문을 포기한 가운데 서발턴의 의식과 믿음을 역사가 자신도 있는 그대로 따라야 할까? 하지만 그 경우 보편성과 합리성은 상실될 것이다. 더욱이 역사주의에 기반을 둔 근대 문명 역시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차크라바르티의 주장은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서발턴의 의식과 삶이 역사주의에 기반을 둔 역사학에 대하여 일종의 도전이자 한계라는 점을 긍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발턴이라는 틈새를 포함하기 위해 역사학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를 지속적으로 문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궁극적인 전언은, 서발턴들의 독특한 삶의 역사들에 기반을 둔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테면 탈중심적 보편성, 해체적 보편성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화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을 지방화하기’라는 기획을 어떻게 우리의 역사와 현실 속으로 번역할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이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질문해보고 또 각자 답변해야 할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매우 힘든 작업이다. 차크라바르티는 마르크스주의의 여러 고전 저작은 물론이거니와 헤겔, 후설, 하이데거 같은 독일 철학자들과 알튀세르, 푸코, 데리다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의 저작들까지 두루 꿰고 있는 데다가, 인도의 역사와 사회, 문학 등에 관한 폭넓은 사료들을 원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서와의 대조 없이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것은 두 번역자의 빼어난 능력과 힘겨운 노력 덕분이 아닐 수 없다.

진태원(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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