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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우익의 먹잇감 된 '반성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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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우익의 먹잇감 된 '반성의 상징'

입력
2014.08.0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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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나온 주민 "철거지시 납득 안 가"

“공원을 십 년 넘게 산책했지만 추도비를 둘러싸고 특별히 문제가 발생한 적이 없었는데…. 군마현의 철거 지시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네요.”

지난 달 30일 일본 군마(群馬)현 다카사키시 군마의 숲. 조선인ㆍ한국인 강제연행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조성된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의 추도비’앞을 지나던 50대 주민은 “하루 빨리 좋은 해결책이 나오면 좋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군마의 숲은 26㏊의 방대한 부지에 조성된 현립공원이다. 추도비는 공원 북쪽 산책로에서 3m 가량 벗어난 인적이 뜸한 지역에 세워져 있다. 높이 2.5m, 폭 7m의 추도비 정면에는 ‘기억, 반성 그리고 우호’라는 글이, 뒷면에는 “다시는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문장이 한글과 일본어로 적혀있다. 군마현에 강제 징용으로 끌려와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 숨진 한국인 6,000여명의 넋을 달래기 위해 ‘추도비를 만드는 모임’(현재는 지키는 모임)이 2004년 설립한 이후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조용하고 경건한 추도의 장으로 활용되던 추도비는 우익세력들이 반일의 상징으로 규정, 철거운동에 나서면서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우익들은 시민단체가 추도비 앞에서 정치적 발언을 했다는 점을 트집 삼아, 현에 무차별 팩스 공세와 함께 보수세력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현의회에 철거 압력을 위한 청원서를 넣었다. 결국 자민당이 다수인 현의회는 지난 달 추도비 철거를 허용하는 결의안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군마현도 지난 달 22일 오사와 마사아키(大澤正明) 지사 명의로 “추도비가 정치 행사에 이용되고 추도비의 존재 자체가 논쟁의 대상이 돼 현민이 공원을 이용하는데 불편을 겪게 됐다”며 추도비를 지키는 모임 측에 자진철거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추도비를 지키는 모임은 현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해 소송으로 맞대응할 예정이다. 이와 함께 추도비를 지키기 위한 시민운동도 전개하기로 했다. 이 모임은 성명서를 통해 “추도비는 설립 당시 한일, 북일 문제에 그치지 않고 아시아 국가와 우호를 다지는 상징으로 시민단체, 현, 일본 정부가 힘을 합쳐 설립한 것”이라며 “우익 세력의 의도적 소란행위에 굴복, 철거지시를 내리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군마현 도시계획과 관계자는 “규정에 따라 결정을 내린 만큼 이의가 있다면 소송을 통해 가리는 수밖에 없다”고 소송에 대응할 뜻을 밝혔다.

일본 전역에는 이같이 강제징용 등 일본의 과거 잘못을 반성하는 추도비가 여럿 있다. 하지만 군마현의 추도비가 특히 우익세력의 표적이 된 것은 최근 일본 사회에 불고 있는 자화자찬 신드롬을 반영한 대표적 사례다. 아베 신조 총리는 ‘아름다운 일본’을 구호로 자기 긍정을 강조하는가 하면, 음식과 기술을 소개하는 서적들은 “일본만이 할 수 있는 것” “역시 일본”이라는 수식어로 독자를 현혹하고 있다. 이런 자기최면이 부각되면서 부끄러운 과거를 부인하고 지우려는 시도가 발생하고 있다.

다카사키시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도미오카(富岡)시에는 도미오카제사장이라는 유적지가 있다. 일본 최초의 명주산업시설로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지난달 31일 이 곳에서 만난 60대 여성 관광객은 우익세력들의 집요한 반대운동으로 추도비가 철거 위기에 놓였다는 사실에 우려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본의 밝은 면을 부각시키기 위해 부(負)의 유산을 숨기려고만 드는 것은 그야말로 편협한 생각이에요. 요즘 젊은이들은 일본의 과거 잘못에 대한 반성에 너무 인색해요.”

과거 침략전쟁을 경험하고 반성의 역사를 배운 기성 세대와는 달리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우익들은 일본의 자랑인 문화유적 주변에 과거를 반성한 추도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불쾌하게 여긴다. 일부 우익사이트에서는 “도미오카제사장에 최근 외국인 방문이 늘고 있는 마당에 군마현 추도비 논란이 자꾸 거론되는 것은 곤란하다”며 “더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쳐 하루 속히 철거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익세력들은 도미오카제사장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 단계인 2012년 하반기부터 조직적인 추도비 철거 운동을 펼친 정황도 드러났다. 지난달 30일 만난 군마의 숲 관리자는 “2012년 11월께 사전 집회허가를 얻지 않은 우익단체 회원 수십 명이 현수막 등을 들고 추도비 앞에서 불법 집회를 벌이려다 적발돼 관리직원과 몸싸움이 벌어진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는 “이들 중에는 군마현이 아닌 외지 사람도 다수 있었다”며 “인터넷을 통해 추도비 철거 집회 참석자를 모은 것”이라고 말했다.

도쿄=한창만특파원 cmha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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