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톡2030]

'일코'란 말 들어보셨나요. 기성세대에겐 생소한 단어지만, 2030세대 사이에선 꽤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일코는 ‘일반인 코스튬플레이(만화나 게임의 주인공, 스타를 똑같이 분장하여 흉내 내는 놀이)’ 의 줄임말입니다. 연예인이나 만화, 게임 등의 취미 생활에 높은 정성과 시간을 쏟으면서 남들 앞에서는 그렇지 않은 척 감추는 것을 뜻하지요. 재미있는 표현이지만 단어 자체에 일반인과는 다른,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사람이라는 다소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일코는 분명 하나의 현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코에 빠져있는 이들 역시 할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왜 일코가 되었을까, 그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아이돌 그룹 엑소의 한 팬이 모은 앨범과 물품들

“나이 먹어서 아이돌 좋아하는게 뭐가 나빠!”

직장인 엑소맘이에요. 저는 외모에 관심도 많아서 잘 꾸미는 편이고, 회사도 나름 괜찮은 데 다니면서 돈도 잘 벌어요. 주말엔 운전 연습도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있는 평범한 여자에요. 남자친구는 없어요. 우래기(울 애기)들 동영상 챙겨보고 투표하기도 바쁜걸요. 하지만 어디 가서 이런 얘기는 절대 못 꺼내요. 이렇게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저를 주위에서는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 취급을 하거든요. 한 번은 친한 친구가 정색하고 한숨을 푹 쉬면서 “야, 니 나이에 무슨 엑소야? 정신차려” 라고 말하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니까요. 그 때부터는 가족은 물론 친한 친구에게도 이런 제 덕질은 비밀이에요. 어쩌면 주위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일코를 시작한 거지만, 이제는 이게 스스로도 편해졌어요. 그래도 가끔은 답답해요. 우래기들 인생짤 나왔는데 카톡 프사(카카오톡 프로필 사진)로 못 해놓을 때나 새 앨범 나와서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을 때가 정말 힘들어요. 사실 엑소맘들은 카톡 프사만 보면 딱 알거든요. 함께 비밀을 나누는 친구들 같고. 하지만 전 친구들이 제 핸드폰 앨범을 볼 때도 가슴이 철렁해요. 혹시 엑소 사진을 다운 받아놓고 잠금을 안 걸어놨나 하고요. 일코를 하면서 이렇게 불편한 일들이 있다 보니 덕후들을 나쁘게 보는 사람들이 야속하기도 해요.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한다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저는 덕질을 하면서 외롭지도 않고 즐거워서 좋은데. 공통된 무언가를 좋아하는 집단에서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대화하는 것이 정말 좋아요. 그 소속감 때문에 팬심도 깊어지고 팬들끼리 더욱 끈끈해지는 것 같아요. 팬들끼리 ‘으쌰으쌰’ 음원 스트리밍 돌리고 인터넷 투표도 열심히 해서 엑소 1위 만들어줄 때가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엑소 웃는 모습에 우리 팬들은 더 행복하니까. -직장인 전모(29ㆍ여)씨-

만화를 좋아하는 한 대학생이 수집해 책장을 가득 메운 만화책들

“만화책만 보면서 대학은 대체 어떻게 갔어요?”

제가 만화 이야기를 하면 십중팔구 이런 말이 나옵니다. 만화책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상대방이 말한 작품을 안 봤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상대방에게 아는 만화를 다 말해보라고 하고 그에 대해 스토리부터 작가, 출판시기, 배경지식, 관련 만화까지 척척 대답하면 대체 얼마나 만화를 봤느냐. 만화책만 보고 살았느냐. 만화책만 보면서 대학은 대체 어떻게 갔냐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만화에 대해 전공 지식처럼 얘기하다 보니 상대방은 이상하게 생각하더군요. 하지만 이상합니다. 전공지식을 이야기하면 박식하다고 하면서 정작 만화에 대해 이야기하면 오타쿠로 봅니다. 특정 분야에 똑같이 박식함을 드러냈는데도 사람들의 반응은 상반됩니다. 그 때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이 내 취미를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도 평균적으로 하루에 8시간 정도 만화를 봅니다. 어떨 땐 꼬박 이틀 동안 만화만 보기도 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꾸준히 만화책방을 다녔습니다. 벌써 18년이 지났네요. 제 삶에서 만화는 늘 저와 함께 있어준 떼려야 뗄 수 없는 ‘평생친구’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만화 보는 시간을 아까워합니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다 보니 비생산적인 취미활동에 시간을 낭비 한다고 여기는 것 같습니다. 만화를 볼 시간에 더 생산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고려대 학생이면 학력이 좋은 축에 속하는 것 아니냐고요? 학력이 좋으니 취미생활도 즐기면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시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펙 쌓을 시간을 취미생활을 하느라 날려 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 벌이도 좋아지면 만화 보는 것을 취미생활로 인정해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들 세계에서는 이른바 ‘성공한 덕후’라고 부르거든요. -대학생 허모(28ㆍ남)씨-

그룹 신화 팬인 김모씨가 모은 이민우의 앨범들. 김씨는 “지금은 구할 수 없는 것들이어서 중고 사이트에서 어렵게 구했다”고 설명했다.

스무 살 때부터 벌써 10년 넘게 ‘신화’를 좋아하는 팬입니다. 저는 네이버의 ID가 2개입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ID와 오로지 팬질만을 위한 ID가 하나 더 있습니다. 오랫동안 일코로 생활하며 혼자 좋아하고 응원했지만 최근 30대 팬클럽 커뮤니티 카페를 알게 됐고, 여기에서 남들 모르게 활동하기 위해 두 개의 ID를 만들었어요. 이 커뮤니티에서는 마음껏 신화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정보도 공유할 수 있어요. 콘서트도 함께 보러 다니고요. 일상생활 속 주변사람들과는 나눌 수 없는 소속감 같은 감정을 나누는 거죠.

하지만 여전히 사회에서는 일코입니다. 작년에 신화가 컴백하고 한때 인기가 많아져서 지인들과 만나면 화제가 자연스럽게 신화에 대한 얘기로 넘어간 적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신화에 대해선 전혀 모르는 척을 했어요.

패션 업계에서 일을 하다 보니 연예인들의 옷을 협찬해줄 기회가 많은데, 작년에는 회사에서 제가 적극적으로 주도해서 신화에게 옷을 협찬해 준 일도 있습니다. 팬으로서 신화가 좋아서 한 일이지만 우리 회사 브랜드의 홍보 효과도 컸죠.

사실 일코도 생각만큼 한심하게 연예인에 빠져 살진 않거든요. 대부분 팬심 만큼 열심히 사는 사람들인데 안 좋게 보는 시선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어요. -직장인 김모(33ㆍ여)씨-

게임 트로피코의 게임 장면. 캡쳐

저는 PC용 게임을 좋아하는 일코입니다. ‘스타크래프트’, ‘리그오브레전드’는 기본이고, ‘트로피코’, ‘발더스게이트’ 같은 생소한 이름의 게임도 즐깁니다. 한번 게임에 빠지면 저는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게임을 합니다. 한번은 게임을 하느라 학교 수업을 연달아 빼먹고, 심지어 밥 먹는 것도 귀찮아서 물만 계속 마시면서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평소에는 평범한 대학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모에도 더 많이 신경을 쓰고, 옷도 잘 갖춰 입고 다닙니다. 대부분 오타쿠들이 외모에 관심이 없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부정적 시선도 있지만 저는 오타쿠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더 많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만화나 게임을 좋아한다고 하면 특별한 취미를 가졌다고 하지만, 뚱뚱하고 외모가 별로인 사람이 그런 취미를 가지면 오타쿠라는 이름이 붙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사회적 시선 때문에 저희 같은 게임 팬들을 사회적으로 위험한 사람인 것처럼 묘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GOP 총기 난사 사건 때 언론이 나서 임병장이 게임, 애니메이션에 빠져 살았다는 점을 들먹이면서 서로 대단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도하기도 했죠. 하지만 절대로 그게 일코의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합니다. -대학생 허모(24ㆍ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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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in

전문가 의견

질문

우리 사회 일코 문화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답변

여전히 대한민국에는 연예인을 ‘딴따라’로 보는 인식이 있고, 딴따라를 지나치게 따르는 것이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보는 시선이 있습니다. 최근에 시대가 변해 그러한 시선이 완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은 나이, 성별, 지위에 따라 어느 정도로 바람직한 모습, 인간상이 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나이 먹은 사람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책임감과 의무가 정해져 있습니다. 성인은 자신이 벌어놓은 재화와 시간을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써야 한다고 강요 받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자신이 열심히 번 돈과 시간을 연예인 등에게 투자하는 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회 시민으로 보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향한 사회적 인식이나 보여지는 것 때문에 자신의 취미생활을 밝히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가 잘못 됐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고, 좋아하는 연예인의 작품을 보며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합니다. 결국엔 일코가 사라져야 건강한 사회가 된다고 봅니다.

-박지종 대중문화평론가-

우리나라에서는 무언가에 몰입하면, 그걸 비정상적이라 생각하지요. 한마디로 ‘가만있어라’라는 문화의 연장선상입니다. 너희는 우리가 시키는 대로 가만있어라, 일반적인 교육과정 안에서 가만있어라, 국가가 시키는 대로 가만있어라, 라는 인식이 너무나 강하다고 봅니다. 이건 아마도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그 이후 독재정권에 의해 강하게 형성된 것 같습니다.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에 대해 늘 ‘가만있어라’, ‘튀지 말아라’를 요구했고, 평범한 이들은 조금이라도 선에서 벗어나면 절멸되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가족중심주의와 가만있어라의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지요.

일코 현상이 사라지려면 다양성이 존중 받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양성의 존중은 소수자에 대한 존중을 통해 형성된다고 봅니다. 여기에 하나 더, 국가주의가 아니라 개인주의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나와 다른 이들을 적으로 몰아가는 게 아니라 나의 권리가 중요한 것처럼, 그들의 개인으로서의 권리도 존중해야 합니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만화착장전공 교수(만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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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강희경기자 kstar@hk.co.kr

강경실 인턴기자(서울여대 언론홍보학과 4)

김상우 인턴기자(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4)

김하나 인턴기자(서울여대 국어국문학과 4)

이화정 인턴기자(광운대 전자융합공학과 4)

위용성 인턴기자(동국대 문예창작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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