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국 견문록] <1> 울산 장생포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한 지역의 역사와 풍물, 그곳에 얽힌 삶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새 기획 ‘신한국견문록’이 처음 찾은 곳은 고래의 꿈이 맴돌고 있는 울산 장생포다.
동해에 고래가 넘쳐나던 시절, 장생포는 고래잡이 전진기지로 흥청거렸다. 하지만 1986년 상업포경이 금지되면서 장생포는 급작스런 쇠락을 맞게 됐다. 인적조차 드물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던 장생포가 최근 다시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장생포를 되살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고래였다. 포경이 아닌 고래관광으로 장생포가 다시 부활하고 있다.
울산 도심에서 동쪽 화학공단의 파이프라인 숲을 따라 울산항 방면으로 차를 달리면 울산만 안쪽에서 작은 포구 하나를 만날 수 있다. 길가엔 왕성고래, 소라고래, 홍서방네고래 등 유독 고래 음식점이 많다. 고래의 꿈이 맴돌고 있는 땅, 장생포다.
과거 우리 선조들은 동해를 경해(鯨海)라 불렀을 정도로 우리 바다에는 고래가 많았다. 장생포는 1891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일본으로 가다 장생포 앞바다에서 큰 고래 떼를 발견, 이곳을 고래해체장으로 이용하면서부터 고래마을이 됐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도 포경선이 드나들던 장생포는 해방 이후엔 국내 고래잡이의 전진기지가 형성됐다.
“그땐 동해에 고래가 넘쳐났심더. 요즘 ‘로또’라 카는 밍크고래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심더. 주로 ‘장수경’(긴수염고래)을 잡았지예. 작은 놈은 길이가 40자(尺)(12m), 큰 놈은 70자(21m)가 넘었심더. 61자(18m)가 넘으면 품삯을 배로 줬으니 고랫배를 탄 사람은 다들 큰 놈만 잡을라꼬 애를 썼지예.”
고래잡이로 흥했다 포경 금지돼 쇠락
피가 끓던 30대에 포경선에 몸을 실어 말단 선원에서 갑판장을 거쳐 포수 위치까지 올랐던 우리나라 상업포경시대 마지막 포수 김용필(76)옹은 고향 장생포의 과거를 이렇게 회고했다. 그는 아직도 고래 얘기만 꺼내면 힘이 솟구친다. 80년대 초반 음파탐지기가 설치된 포경선을 타고 넉 달 동안 장수경 등 고래 130여마리를 잡은 기억도 있다.
장생포 주민들은 지금도 고래로 흥청거렸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포경선이 고동을 울리며 귀환할 때면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축제 같은 분위기가 이뤄졌다. 고래를 해체하다가 구경 나온 사람들에게 고기를 한 덩이씩 던져주는 등 고래 인심도 후했다.
하지만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가 상업포경 금지를 선언하면서 장생포는 급격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인근에 석유화학공단이 들어서자 주민들이 하나 둘 떠났고, 한때 2만명에 이르던 인구는 1,300여명으로 확 줄었다.
특구 지정되고 체험관, 여행선 등 갖춰
황량해진 이곳을 다시 살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다시 ‘고래’였다. 울산 남구가 포경 전진기지 장생포를 고래관광지로 바꾼 것이다. 2005년 고래박물관 건립, 2006년 고래연구소 유치, 2008년 고래문화특구 지정, 2009년 고래바다여행선 운항과 고래생태체험관 개관 등 일련의 고래관광 인프라가 확충됐다.
사실 울산과 고래의 인연은 선사시대까지 올라간다. 울산 태화강 지류 내곡천 상류의 깎아지른 절벽에 있는 반구대암각화(국보 제285호)가 이를 증명한다. 7,000년 전 울산에 터를 잡은 선사인들이 그린 바위그림엔 58마리의 고래가 그려져 있다. 흰수염고래, 향고래, 귀신고래 등 종류별 고래의 특징이 정밀하게 묘사돼 있고, 그 중엔 새끼 고래를 업고 가는 고래 그림도 있다. 반구대암각화의 백미는 선사 암각화론 세계에 하나뿐이라는 작살 맞은 고래그림이다. 이는 인류 최초의 포경 그림이라고 한다. 미국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1884~1960)가 학계에 보고한 ‘한국계 귀신고래’를 처음 발견한 곳도 장생포였다.
고래박물관은 국내 최초 고래테마 시설로 2008년 장생포가 고래문화특구로 지정되는 밑거름이 됐다. 고래생태체험관에선 살아있는 돌고래의 재롱을 볼 수 있다. 현재는 장생포 고래문화마을이 내년 3월말 완공을 목표로 조성되고 있다. 선사시대부터 이어온 고래문화체험과 고래뱃속체험 등 실물크기의 다양한 고래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조각정원 등이 들어서고, 과거 포경전성기 장생포의 생활상을 그대로 재현한 ‘옛장생포마을’도 조성된다.
'고래관광' 작년 하루 2,000명 인파
이처럼 장생포에 고래관광이 본격화하면서 쇠락하던 마을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지난해의 경우 이곳 고래관광 시설을 이용한 방문객이 장생포 전체 인구 1,300여명보다 1.5배 많은 하루 평균 1,980명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상권도 활기를 되찾았다. 고래고기 전문점 ‘원조할매집’의 윤경태(49) 사장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매출도 크게 올랐다”면서 “고객들에게 인상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상인조합을 결성해 음식을 차별화하고, 기념품을 비치하는가 하면 손님들에게 홍보책자를 나눠주는 등 다시 찾아온 기회를 살리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6ㆍ4 지방선거에서 새로 뽑힌 서동욱 남구청장은 장생포에 높이 150m의 대형 고래등대 설치를 구상하고 있다. 그는 “등대 내부에 관광객이 숙박할 수 있는 멋진 호텔을 조성하고, 세계적 명성의 건축가를 사업에 참여시켜 민자를 유치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장생포에서 고래고기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포구 주변엔 현재 전문점만 20여 곳. 포경이 금지됐지만 어부들이 가자미 등을 잡기 위해 쳐놓은 그물에 고래가 혼획(混獲)된 경우 당국에 이를 신고, 작살 자국 등 의도적 포획 흔적이 없으면 공매절차를 통해 유통된다. 부위별로 12가지 맛을 내는 고래고기는 희소성 때문에 한우보다 비싼데도 이곳 전문식당엔 손님들이 넘쳐난다.
울산고래축제 6일까지
장생포에선 3일 시작한 ‘2014 울산고래축제’가 6일까지 진행된다. ‘고래 안에 울산 있다’는 주제의 올해 축제는 20회째로 총 35개 프로그램이 준비됐는데, 그 동안 도심과 이원화됐던 행사의 무게 중심을 장생포로 옮겼다는데 의미가 있다. 축제를 주관하는 김진규 고래문화재단 이사장은 “올해는 고래축제가 장생포에서 4계절 축제로 성장하는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울산=목상균기자 sgmok@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