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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이제는 버려야 할 ‘본전(本錢) 생각’

입력
2014.06.2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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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께서 연회비 50만원을 내고 테니스 클럽에 가입했다고 가정하자. 연습장에 1개월 다녔는데 무릎 관절을 다쳤다. 불행히도 지금 그만둬도 회비는 반환 받을 수 없다고 하자. 그렇다면 50만원이 아까워서 아프더라도 참고 다니는 게 좋을까.

다른 정치인은 몰라도, 안철수 새정치국민연합 공동대표만큼은 이 문제의 해답을 알고 있다. 그는 2012년 저서 ‘안철수의 생각’에서 당시 이명박 정부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성크 코스트’(Sunk Costㆍ매몰비용)란 용어를 빌려 공격했다. 당시 그는 “단기간에 이 같은 국가재원을 쏟아야 할 만큼 우선순위가 높은가. 향후 유지보수비 등을 산출해 추가로 엄청난 돈이 든다면 지금까지 들어간 돈은 ‘성크 코스트’(Sunk Cost)로 보고 냉정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안 대표가 사용한 ‘성크 코스트’는 테니스 클럽 사례의 해법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회계학 용어다. 아무리 많은 돈이 들어갔어도 미래에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한다면 의사결정에 반영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본전생각’ 에 따른 무리한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이론과 실제가 다르듯이 아무리 똑똑한 사람들도 본전생각에서 헤어날 수 없다. 심리학을 경제학에 접목시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미국 프린스턴대 대니얼 카너먼 명예교수는 투자실패의 대표 원인으로 매몰비용 효과를 들었다.

평소에는 멀쩡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본전생각 때문에 사고를 치는 건 실제 우리 주변에서 너무 자주 목격된다. 대표 사례가 군대 폭력이다. 군대를 다녀온 많은 분들이 동의하듯이 군내 언어폭력과 가혹 행위가 끊이지 않는 것은 그 알량한 본전생각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내가 이등병 때 당했으니 너도 당해야 마땅하다’는 식이다. 이등병은 힘들어야 하고 병장은 당연히 편해야 한다는 오랜 관습도 존재한다.

정쟁을 일삼는 정치권과 이를 부채질 하는 일부 언론의 행태도 본전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 야당은 그들이 여당이던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때 당시 야당에게 당했던 분풀이를 그대로 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명한 장관 후보자에 대한 ‘학자로서 양심도, 장관 자격도 없는 부도덕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는 비난은 노무현 정부 시절 한나라당이 퍼붓던 말이다. 마찬가지로 ‘거대 야당이 국정 발목을 잡고, 총리 후보자의 국정 수행능력 검증은 외면한 채 도덕적 흠을 찾는 데만 매달린다’는 새누리당의 정부 옹호적 태도는 김대중 정부 시절 집권당의 논평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의 낙마 과정에서 전개된 언론의 난타전도 마찬가지다. 문 후보자가 일부 언론으로부터 부당한 공격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 언론 매체는 참여정부 시절 전체 맥락과 상관없이 일부 발언만 툭 떼어내 노 전 대통령을 공격한 대표 주자다. 이번에는 KBS가 일부 편집된 장면을 내보냈지만, 2004년에는 MBC가 보수단체 집회 장면 중 선동적 부문만 골라내 방송했었다.

‘과거에 내가 당했으니, 너희도 당해 봐라’는 식의 정쟁은 이번 만이 아니다. 지난해 말 야당은 정치개입을 문제 삼아 현 정부에 대해 국정원을 개혁하라고 채근했지만,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서도 국정원의 정치개입 논란은 존재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도 야당이 대선 불복 움직임을 보인다고 맞섰지만, 2002년말 노 전 대통령 당선 직후 재검표를 요구하며 승복하지 않은 장본인이 바로 그들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이제 정치권은 ‘본전생각은 잊기로 했다’는 서약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상대를 용서하기에는 우리가 너무 당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다면 ‘아들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사형대에서 끌어 내린 이란 여인을 떠올리면 될 것이다. “원수를 용서한 뒤에야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는 사메레 알리네자드라는 이란 여인의 증언은 우리 사회 구조적 문제가 뿌리 깊은 본전생각이라는 걸 보여준다.

조철환 국제부 차장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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