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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중동 민주주의 울리는 최루탄… 대부분이 '메이드 인 코리아'

입력
2014.04.10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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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을 쏘지 마라."

6월 항쟁의 불길이 일던 1987년 6월 26일. 대규모 평화대행진이 벌어진 부산 문현로터리에서 맨몸을 드러낸 남성이 최루탄을 쏘려는 경찰을 향해 달려가며 그렇게 외쳤다. AP통신이 담은 이 모습은 20세기 100대 사진으로 선정돼 한국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 됐다. 최루탄은 한국 민주화 역사에서 언제나 그 한가운데 있었다.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로 발견된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군의 시신은 4ㆍ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최루탄 겉면에는 'Don't use on the crowd'(군중을 향해 사용하지 마십시오)라고 기록돼 있었다고 한다. 1987년 6월 9일에는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인 이한열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숨졌다. 이를 계기로 전국에서 100여 만 명의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군사정권을 끝내고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6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최루탄은 지속적인 반대 여론 끝에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9년 한국에서 자취를 감췄다. 유럽인권재판소는 2012년 4월에 '최루탄 사용은 고문'이라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최루탄 사용이 명백히 인권침해적 요소가 있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국, 바레인의 최루탄 최대 수출국

"한국의 최루탄 수출을 제발 막아달라."

영국에 체류 중이던 빌 마크작(28)은 지난해 10월 한국 시민단체인 '전쟁없는 세상'에 이메일 한 통을 보냈다. 마크작의 고향인 바레인에서는 2011년 이후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가 불붙고 있다. 시민들은 지난 200년 간 바레인을 지배해온 왕정 세력을 몰아낼 것과 정치개혁과 차별철폐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바레인 정부는 시위에 나서는 시민들을 군경을 동원해 무력 진압하고 있다. 이들의 주요 무기는 최루탄이다. 최루탄은 원래 비살상용 무기로 기침과 호흡곤란 등을 유발하지만 인체에 치명적인 피해는 발생시키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바레인 경찰은 최루탄을 총이나 수류탄처럼 살상용 무기로 사용했다. 사람의 머리나 몸을 겨냥해 쏘거나 창문을 깨고 집 안으로 최루탄을 던져 넣었다. 시위대는 최루탄에 맞아 갈비뼈가 부러지거나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고, 집 안에 갇힌 노인이나 어린 아이는 호흡곤란으로 사망했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 간 경찰이 쏜 최루탄에 목숨을 잃은 바레인 시민은 약 7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부상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가 공개한 사망자 자료를 보면 카심 하비브(8세), 사예드 하심(15), 압바스 자파(26), 사키나 마훈(78) 등 최루탄 공격의 대상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었다. 0세라고 표기된 야유 요시프의 사인에 대해 휴먼라이츠는 '임신 중 태아 상태에서 최루탄 가스 노출로 사망'이라고 적고 있다.

마크작은 "그 모든 최루탄이 한국에서 제작해 수출한 것"이라고 이메일에서 밝혔다. 마크작은 바레인의 인권 문제를 살피던 중 시위대를 향해 발사되는 최루탄이 한국산임을 발견했다. 한국은 2011~2012년까지 바레인에 최루탄 약 150만개를 수출했다. 최루탄으로 인한 바레인 시민의 사망자 수가 증가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한국의 민주화 시기가 한창이던 1980년대 경찰이 10년 동안 사용한 최루탄은 모두 187만발로 추정된다. 최루탄을 가장 많이 사용했던 때는 6월 항쟁이 일어났던 1987년으로 약 67만3,588발이었다.. 하루 평균 511발의 최루탄이 시위대의 머리를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바레인은 단 2년 동안 150만개의 최루탄을 사용했다. 하루 평균 약 2,000발 가량으로 우리나라 민주화 시기의 4배 수준이다. 바레인 정부는 최근 재고를 모두 소진했다며 한국에 최루탄 160만개를 추가 주문했다. 마크작은 "이는 바레인 인구(약 120만 명)보다 많은 양이다. 한국의 최루탄이 바레인에 수출돼서는 안 된다"고 간청했다.

세계 민주주의 현장의 최루탄

한국의 최루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국내 시민들을 향해 사용이 금지되자 해외로 판로를 바꿨을 뿐이다. 방위사업청과 지방경찰청에 따르면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바레인(147만6,878개)과 터키(61만3,084만개), 인도네시아(3만9,756), 방글라데시(20만) 등 약 20개국에 한국산 최루탄이 수출됐다. 한국의 70, 80년대처럼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는 곳이 대부분이다.

터키에서는 2001년 취임 이후 장기집권하고 있는 에르도안 총리가 기업 등에서 약 10억 달러(약 1조730억원)의 비자금을 받는 등 정치권력을 부정 축재에 이용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시민들은 에르도안 총리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시위대를 향한 에르도안 총리의 행동은 한국 민주화 시기의 군사 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다. 터키인권협회 등에 따르면 에르도안 총리 정부 아래서 800여명의 언론인이 투옥됐고, 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최?3명이 목숨을 잃고 약 4,100명이 부상을 입었다.

지난 3월 11일에는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은 베르킨 엘반(15)군이 끝내 사망하면서 터키시민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 이스탄불과 앙카라 등 전국 곳곳에서 약 200만 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에르도안 총리는 엘반 군의 사망에 대해 "경찰을 향해 '금속 탄환'을 발사한 정황이 있다"며 그를 테러리스트에 비유했다. 엘반 군의 목숨을 앗은 건 터키 정부이지만, 그의 머리를 향해 날아간 최루탄은 한국산이었다. 이한열과 엘반. 1987년 한국 민주화의 비극은 27년이 지난 지금도 터키에서 반복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도 터키와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10년 간 국내총생산(GDP)이 4배로 증가하는 등 빠른 경제성장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자들은 지난 몇 년간 최저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1999년 물러난 수하르토 대통령은 32년 간의 장기집권 기간 동안 노동조합의 파업권을 제한하는 등 노동자를 억압해왔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재계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국가 경제를 위기로 몰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이에 발맞춰 인도네시아 정부도 경찰을 동원해 시위대를 강경진압하고 있는 상황이다 시민단체인 '인도네시아 경찰 감시'(IPW)는 지난해 정부가 폭력배를 동원해 대학생 시위대를 해산시켰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노동조합 소속 근로자 2만 명은 지난해 수도 자카르타와 베카시 등 주요 지역에서 임금 인상 시위를 벌였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같은 기간 한국에서 최루탄을 대량으로 수입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무기 산업은 피를 먹고 자라는 산업

한국에서 최루탄은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서며 역사의 변방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한국산 최루탄은 여전히 세계 민주화 과정의 중심에 있다.

방사청은 최근 한국산 최루탄이 바레인에서 문제가 되자 수출을 잠정 중단하기로 했다. 백윤형 방사청 대변인은 "국제적인 지탄이 있는 만큼 최루탄에 대한 수출 승인을 내주지 않을 계획"이라면서 "터키와 인도네시아 등에 대해서도 관련 사항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루탄을 제조하는 해당 업체는 "바레인 정부는 한국이 수출을 하지 않으면 다른 나라에서 구하면 될 뿐"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다. 바레인은 최근 구입길이 막힌 한국 대신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최루탄을 수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무기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국가 안보를 위해 필요하지만 동시에 파괴와 인명 살상 등을 목적으로 한다. 일각에서는 무기 산업을 "피를 먹고 자라는 산업"이라고도 지적한다. 시민단체인 무기제로의 박승호 활동가는 "한국이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이집트에 수출한 산탄총 탄약은 민주화 시위를 하던 시민들을 향해 사용돼 수십 명을 죽였다"며 "한국산 최루탄 문제를 계기로 무기가 한국이 핵심 성장동력으로 삼을 만한 분야인지 등에 대해 국민들이 최소한의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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