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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조선왕조실록 밀랍본 복원 길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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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조선왕조실록 밀랍본 복원 길 열렸다

입력
2014.02.25 1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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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체와 기체 중간상태 CO₂이용종이·먹 손상없이 밀랍만 제거하는 첨단 '초임계 유체 추출법' 개발임진왜란 이후 보관기관 늘리려 실록 1229책 중 475책 밀랍시간 흐르며 변색되고 부스러졌지만 속지 밀랍 코팅 세계에 유례 없어국립문화재연구소 9년여 노력 결실원지의 지질 보강 방도 모색 등 복원기술 실제 적용 마지막 숙제

한지에 먹으로 인쇄한 책을 더 잘 보관하기 위해 종이에 밀랍을 입혔다. 벌레와 습기를 막으려고 한 건데 오히려 화가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밀랍이 딱딱하게 굳거나 뭉치면서 종이가 얼룩덜룩 변색되고 아예 부스러지거나 찢어졌다. 원상 복구하려면 밀랍을 벗겨내야 하지만 잘못 벗겼다간 종이가 상할 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인 조선왕조실록 밀랍본 이야기다. 실록 총 1,229책 가운데 밀랍본은 475책, 그 중 131책이 그런 상태다. 밀랍 처리를 하지 않은 생지(生紙)본 실록은 밀랍본과 달리 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2006년부터 밀랍본 실록의 복원 기술을 찾는 데 본격적으로 매달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방법을 알아냈다. 액체와 기체의 중간 상태 이산화탄소를 이용해 종이와 먹의 손상 없이 밀랍만 제거하는 첨단 기술(초임계 유체 추출법)이다. 지난해까지 기술 개발을 마치고 그 결과를 정리한 종합보고서(본문편과 자료편 총 2권)를 냈다. 손상된 밀랍본의 상태 진단부터 원료와 제작 기술, 손상 원인, 복원을 위한 기술 개발의 과정을 상세히 담았다.

밀랍본 475책은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이 보관 중인 정족산사고본 태종~명종 실록 614책에 포함돼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설명에 따르면 책 표지나 낱장 문서를 밀랍 코팅한 고문헌은 중국에 더러 있지만 속지를 전부 밀랍 처리한 책은 전 세계에 유례가 없다.

참고할 유물이 없다 보니 연구에 애를 먹었다. 그렇다고 보존해야 할 실제 유물을 갖고 실험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시험용 견본을 만들어 연구했는데 밀랍본의 제작 기술이 알려진 게 없어서 견본 제작부터 난관을 겪었다. 밀랍본의 한지는 여느 한지보다 조직이 아주 치밀했다. 그런 한지를 만들어서 밀랍을 녹여 붓으로 발랐다. 완성된 밀랍지에 금속활자로 인쇄를 해서 견본을 제작한 다음 밀랍이 변질되는 과정을 재현하면서 손상 원인과 복원 기술을 찾아냈다.

이제 숙제는 개발한 기술을 손상된 밀랍본에 적용하는 일이다. 아직 계획이 잡히지 않았다. 견본으로 연구한 결과를 실제 유물에 적용하려면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일단 밀랍을 안전하게 벗기는 기술은 개발했지만 밀랍을 벗기면 종이의 강도가 떨어질 가능성이 있어 원지의 지질을 보강할 방도까지 찾아내야 한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규장각과 협의해 복원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더 이상 상하지 않게 보관하는 방법도 고민해야 한다. 보존 처리가 안 된 상태라 지금도 손상이 진행 중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찾아낸 최적의 보관법은 질소를 채운 밀폐 공간에 넣어두는 것이다. 현재 규장각은 밀랍본 실록을 항온ㆍ항습 장치를 갖춘 오동나무 서고에 보관하고 있다. 하지만 유기물인 밀랍은 공기에 노출돼 있는 한 변질이 계속되기 때문에 유물이 상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밀랍본 실록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밀랍 코팅 책일 뿐 아니라 실록의 초기 원형을 가장 잘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조선 왕조는 훼손이나 유실에 대비해 실록을 여러 부 만들어서 전국의 사고에 분산 보관했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만 빼고 다 불타 버리자 전후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실록을 다시 만들었다. 밀랍본은 바로 전주사고본의 일부다. 밀랍본 실록도 생지(生紙) 복본이 남아 있어 내용을 파악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 밀랍본을 포함한 전주사고본 실록은 임진왜란 후 강화도 마니산사고로, 병자호란 후 다시 정족산사고로 옮겨졌고 일제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으로, 해방 후 서울대로 이관돼 오늘에 이른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밀랍본 복원 기술 연구에 나선 계기는 1996년 규장각으로부터 실록 중 훼손이 심한 밀랍본 47책의 보존 처리 요청을 받고부터다. 하지만 관련 연구나 전문가가 부족해 보존 처리를 할 수 없었다. 그 뒤 규장각 실록의 상태를 조사한 결과가 2002년 국회와 언론을 통해 널리 알려짐에 따라 2002, 3년 보존 방안 연구가 이뤄졌지만 전문가와 예산 부족으로 만족스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2006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 마침내 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보존과학뿐 아니라 제지공학, 고분자화학, 생물학, 환경공학, 서지학, 전통기술 등 여러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한 학제간 융합 연구로 거둔 성과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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