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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산업화의 그늘 지탱한 어린 여공들의 땀과 눈물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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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산업화의 그늘 지탱한 어린 여공들의 땀과 눈물 생생"

입력
2014.02.14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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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기업인부터 이름없는 여공, 지금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운동가와 문화예술인까지.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구로를 거쳐갔다. 구로 50년은 주역과 조역, 단역이 따로 없는 거대한 대하드라마일지도 모른다.

이들은 과연 어떤 연유로 구로와 인연을 맺게 되었을까. 이들에게 구로는 또 어떤 의미일까. 지금은 각계각층에서 살아가고 있는 '구로 사람들'에게 들어봤다.

"정부 탄압 속 선교 활동… 8시간 노동쟁취 기억에 노·사 화합의 길 희망"■ 인명진(68) 갈릴리교회 목사

한국신학대 2학년 때이던 1970년 전태일씨가 몸에 불을 붙였다. 1년 뒤엔 노동자 김진수씨가 구사대에 의해 끔찍하게 살해됐다. 그 참혹한 잔상이 때문일까. 1972년 목사가 된 나는 구로공단을 찾았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사회운동 차원에서 구로공단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온전히 종교적 이유에서였다. 수많은 '전태일'과 '김진수'들이 모여있던 구로공단은, '낮은 곳에 있는 이웃을 돌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목회자로서 당연히 찾아야 할 곳이었다.

구로에서 처음 시작한 건 '영등포 도시산업 선교회'였다. 노동자들이 하루에도 몇 백 명씩 선교회 사무실을 찾아와 밤을 지새우며 노동법을 공부했다. 그러나 그 해 10월 유신이 시작돼 노동탄압은 절정에 달했고, 난 74년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됐다.

그래도 꿋꿋하게 선교회 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기업들 사이에 '도산(도시산업 선교회의 줄임말)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표어가 있을 정도였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79년 해태제과 노동자들이 국내 최초로 '8시간 노동시간제'를 이끌어 낸 일이었다. 근로기준법에 나와 있는 가장 기본적 권리이고, 지금 보면 대단한 게 아닐 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이 한 걸음을 내딛기까지 수많은 이들이 희생이 있었다.

구로공단은 우리나라 산업화와 민주화가 동시에 태동한 곳이다. 돌이켜보면 노동자들의 삶만큼이나 당시 기업주들도 고생이 많았다. 앞으로 50년은 노동자와 기업인이 애증관계를 청산하고 화합의 길로 나아가는 새로운 역사가 쓰이길 희망한다.

"34년 전 미싱사로 첫발… 철야·특근 공순이·공돌이 고단했던 삶 눈에 선해"■ 심상정(55) 진보정의당 국회의원

벌써 34년이 흘렀다. 대학 3학년 때이던 1980년 나는 구로3공단에 있던 대동전자에 미싱사로 들어갔다. 교육자가 되고 싶어 사범대에 입학했지만, 지식인의 실천적 사명을 요구했던 당시 시대상황은 나에게 교육자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구로공단에서 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세포 하나하나에 새길 수 있었다.

'산업체 특별학급' 형식으로 일을 시작한 16~17살 어린 여공들은 '시다(보조)'가 되어 낮에 일하고 저녁에 공부한 후 다시 철야와 특근까지 감내하는 생활을 반복했다. 늘 잠이 부족했던 그들은 졸다가 프레스기에 손을 넣는 사고를 겪어도 한 달 남짓 치료를 받은 뒤엔 오징어처럼 납작해진 손으로 다시 공장에 출근해야 했다. 공장 정 중앙에 걸려있던 '충효사상'이라는 간판은 노동자들에게 군신의 예를 강요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었다. 노동자들에게 노동권 시민권 등을 가르치는 이른바 의식화 작업을 시작했다. 결혼하고 임신하면 회사를 그만둬야 했던 상황을 타개하고자 임신투쟁도 시작했는데, 3명의 여성이 배가 부른 채 공장에 출근해 출산ㆍ육아휴직의 존재를 부각시킨 적도 있다.

구로공단 시절은 25년간 이어진 내 노동운동의 원동력이 됐다. 내가 그들을 가르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 역시 그들을 통해 많이 보고 듣고 배웠다.

안타깝게도 '공돌이 공순이'시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850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열악한 환경에 내몰려 있다. 노동자들의 진정한 권리가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노동현장서 만난 환자 생전 처음 보는 증상 많아… 보건의료운동의 태동지"■ 임상혁(50) 녹색병원 노동환경건강연구소장

의대 본과 재학중이던 1988년 구로공단 노동자 문송면(당시 15세) 군이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 비슷한 시기에 원진 레이온 강제퇴직 노동자들도 이황화탄소중독 증상을 보였다. 주변 친구들이 하나 둘씩 공장에 '위장'취업해 노동현장에 뛰어드는 것을 보며 나도 어떤 사명감 같은 걸 느꼈고, 자연스럽게 열악한 노동 환경에 눈을 뜨게 됐다.

전문의 자격증을 딴 93년 구로의원이 병원장을 모집했다. 구로의원은 86년 국내 최초로 노동자들을 위해 설립된 병원이다. 운이 좋게도 내가 3대 병원장이 돼 97년까지 근무했다.

노동현장에서 만난 환자들로부터 생전 처음 보는 질병과 증상을 목격했다. 그 동안 학교와 대학병원에서 만난 환자들은 진단과 처방이 명확했지만 산업재해 환자들은 내 의학지식으로는 도무지 진단을 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했다. 수은 중독 납 중독 등은 당시 나에게 생소한 분야였다. 때문에 일과 후 의학서적을 펼쳐 놓고 다?공부를 해야 했다. 그래서 나에게 구로공단은 학창시절보다 더 많은 공부를 하게 만든 곳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 시절을 자양분 삼아 나는 지금도 노동자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당시 내 월급은 보통 의사들의 30%밖에 되지 않았다. 직원들 임금수준도 매우 낮았다. 그럼에도 나는 구로의원 시절이 고맙고, 그곳에서 일해준 분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의료인의 시각으로 본다면, 구로공단은 노동자들을 위한 보건의료 운동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하고 있는 수많은 의사ㆍ약사 단체 소속 의료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용접·문학활동 병행 제2의 고향 다름없어… 비정규직의 아픔 지금도"■ 송경동(47) 시인

1992년 시인으로서 어떤 이야기를 다뤄야 하나 고민하다, 나와 비슷한 또래 이야기를 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구로노동자 문학회'에 들어갔다. 용접노동을 하며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했고 다양한 문화활동을 공유했다. 대부분 시골출신이었던 그들과 소년원 출신인 내 삶의 궤적은 '비주류'라는 이름으로 한데 얽혔다.

노동자들에게 사랑 받는 '구로동 시인'이 되고 싶었다. 등 노동자들의 삶을 시로 남기고, 이라는 월간잡지를 펴낼 수 있었던 것 역시 당시 활동이 켜켜이 쌓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노동자 문학회를 통해 아내를 만난 것이 내 인생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학회 뒤풀이 음식 준비를 위해 가리봉 시장을 돌아다니며 3년간 연애한 끝에 결혼에 골인했다. 가정을 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모든 과정을 구로공단에서 겪었다. 문학가로서도 한 명의 사회인으로서도 구로공단은 제 2의 고향이다.

구로의 외관은 참 많이 변했지만, 그 내용물은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디지털산업단지라는 세련된 이름으로 포장됐지만, 비정규직이 대부분인 노동자들은 터무니 없는 임금수준을 감내하고 살아간다. 또 예전 어린 여공들이 고생을 했던 것처럼, 현재는 이주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다. 구로공단의 향후 50년은 높이 솟은 빌딩만큼이나 노동자들의 삶 역시 비상하는 역사로 채워지길 희망한다.

"다국적 기업 이전으로 열악한 노동환경 직시… 여성운동에 투신 밑거름"■ 유옥순(63) 남부여성개발센터소장

1974년 내가 일하던 다국적기업 콘트롤데이타코리아가 염창동에서 구로공단으로 이전했다. 콘트롤데이타코리아 노동자들은 구로공단 입성 첫날 관광버스 16대에 나눠 타고 출근했는데, 당시 다른 공단근로자들에겐 상상도 하기 힘든 진풍경이었다. 이는 앞서 73년 노조를 결성한 콘트롤데이타코리아 노동자들이 회사이전조건으로 사측으로부터 통근버스 운영 약속을 받아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상대로 구로공단의 환경은 열악했다. 하루 18시간씩 일하던 기존 공단 노동자들의 눈에 주 42시간 근무를 하는 콘트롤데이타코리아 노동자들의 삶은 신기함 그 자체였다. 이 무렵부터 노동자들은 조직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롬코리아 남성전기 동일방직 등에 노조가 생겼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82년 복직파업이다. 그 해 3월 노사협상을 마무리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사측은 나를 포함한 교섭위원 3명에게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했다. 이에 항의하며 전 조합원이 8박9일간 전면파업에 나섰다. 미국 본사에서 날아온 부사장은 '한국정부가 해고를 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니 정부와 합의하면 복직 시키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노동청을 찾아가 합의를 시도했지만, 복직은커녕 오히려 미신고집회라는 이유로 구속당했다. 그 사이 콘트롤데이타는 미국으로 철수했고 나는 공단 내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렇게 내 공원생활도 마무리됐다.

구로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지금도 나는 모든 여성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60대를 바치고 있다.

"중학교 졸업하고 상경 가리봉동서 쪽방촌 생활… 온갖 고생 딛고 기업 일궈"■ 김태주(42) 에이원 대표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한 나는 형님이 살고 있던 가리봉동 쪽방촌에 정착했다. 그것이 구로공단과 첫 인연이었다. 1997년까지 약 10년 동안 잡화공장에서 공원생활을 했다.

나에게 구로공단은 '인생역전'의 터였다. 굴뚝에서 피어나는 연기와 커다란 공장들을 보며 나는 '언젠가 나도 저런 건물을 가져야지'라는 마음을 먹었고, 그런 결심으로 힘든 하루하루를 버텼다.

공부가 하고 싶어 인근 영등포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주중 저녁과 주말 오후에 학교를 다녔다. 학업과 일을 병행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다.

공단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열악한 노동환경 탓에 결핵을 심하게 앓았고, 끼니를 제때 챙겨먹지 못해 위장병도 달고 살았다. 그때 방통고 선생님이 해주신 '남과 똑같이 해서는 남들보다 성공할 수 없다'는 말씀은 큰 힘이 됐고, 이는 지금 내 회사의 사훈이기도 하다.

97년 구로를 떠난 후 강서구와 종로구 등에서도 노동자 생활을 했다. 아끼며 돈을 모아 2003년 개인사업을 결심했는데, 마음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구로공단에서 하고 싶었다.

지금 나는 구로공단에서 잡화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잡화 공원으로 시작해서 기업주가 된 것이다. 한 우물만 파며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우리 회사는 어느덧 연 매출 100억원이 넘은 건실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돌이켜보면 구로공단은 나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근면성실과 이를 토대로 한 성장의 역사가 구로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고 생각한다.

박주희기자 jxp93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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