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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구로공단 50년… '여공'이었던 조분순씨 "세상은 과연 그때보다 좋아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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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구로공단 50년… '여공'이었던 조분순씨 "세상은 과연 그때보다 좋아졌나요?"

입력
2014.02.1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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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분순(57)씨는 1970~80년대 구로공단에서 청춘을 보냈다. 열아홉 나이에 시골에서 올라와 완구 공장에서 하루 열 시간 넘게 '기계'처럼 일하고, 몇 푼 안 되는 월급으로 오빠와 남동생까지 뒷바라지했던 그 시절 전형적인 '여공'이었다. 그러다 비참한 현실에 눈을 떠 노동조합 결성에 앞장섰고 결국 옥고까지 치러야 했던 그의 삶엔 파란만장한 한국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낼 모레면 우리 나이로 예순. 이젠 평범한 주부이자 세탁소 주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가 모처럼 40년 전 갈래머리 여공 시절을 보냈던 구로공단과 자신이 살았던 집을 둘러봤다. 검은 연기를 내뿜던 공장은 사라지고 화려하고 웅장한 IT 밸리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그 뒤 켠 골목엔 '벌집' 같은 옛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조씨는 "과연 그 때보다 세상은 좋아진 것일까"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구로공단은 '한강의 기적'을 만든 한국경제 고도성장의 아이콘이다. 하지만 번영의 이면엔 억압과 희생, 분노가 서려있다. 산업화와 민주화, 70년대 이후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이 두 갈래 물줄기가 만나고 뒤엉킨 지점이 바로 구로공단인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구로공단이 올해로 설립 50년을 맞았다. 구로 반세기에 대한 조명은 산업화와 민주화의 갈등을 여전히 치유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에게 구로는 어떤 의미일까.

서울 구로구 남부순환로 105길 86-3. 'ㄷ'자 모양의 이층 다세대 주택은 고즈넉했다. 조분순씨는 '106호'를 가리키며 "두 오빠와 남동생까지 넷이서 지낸 곳"이라며 "벌집처럼 빈틈없이 붙어있는 방이 수십 개였고 수백 명 젊은이들이 거처했다"고 말했다. 마당 한 가운데를 가리키며 "이곳에 우물이 있었는데 아침 저녁으로 세수, 빨래 등 모든 일을 해결하느라 그야말로 전쟁터 같았다"고 회상했다.

조씨와 구로공단의 인연은 1975년으로 거슬러 간다. 열아홉 살이던 그는 취직자리를 찾아 고향 전북 고창에서 상경했다. 취직 준비를 하는 큰 오빠, 고등학생이던 남동생을 대신해 조씨는 작은 오빠와 둘이서 1만4,000원 월급으로 생계를 책임졌다.

첫 직장은 완구공장. 정말 기계처럼 일했다. 야근과 철야는 기본. '라인반장'은 매일 개수기로 몇 개나 작업 했는지를 셌고, 다음날 무조건 그 이상을 채우지 않으면 혼이 나야 했다. 여가나 휴식? 그런 건 애초 있지도 않았다.

이게 여공의 삶이었다. 가족을 위해 진학까지 포기하며 헌신적으로 일했고, 쥐꼬리만한 월급에도 감사했고, 가혹한 노동조건과 인격적 모독까지 견뎌가며 재봉틀을 돌렸지만, 그리고 이들의 노동력으로 결국 한국경제의 고도성장이 가능했지만, 사회에선 되레 '공돌이' '공순이'란 경멸이 되돌아왔다.

조씨가 현실에 눈을 뜬 건 '산업선교'를 접하면서부터다. "비밀공간에 모여 인명진 목사님으로부터 세상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됐어요. 무엇이 잘못됐길래 우리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면서 정말로 서러웠지요."

그 시절엔 이직도 잦았다고 했다. "퇴근하면 벌집 옥상에 모여 각자 월급얘기를 하고 조건이 좋다 싶으면 직장을 옮겼어요. 조립이든 봉제든 어차피 단순작업이라 별 문제가 없었죠."

조씨는 새 회사에서 노조결성에 나섰다. 그러나 80년 계엄령 하에서 노조설립은 쉽지 않았다. 사측은 어용노조를 내세워 방해했고, 어렵사리 설립까지는 성사됐지만 전두환 정권의 '노조 정화조치'에 노조위원장은 출근까지 금지됐다. 부위원장이었던 조씨가 대신 체불임금을 받아내기 위해 농성을 주도해야 했다. 하지만 오일쇼크 여파로 회사는 결국 문을 닫았고, 그는 직장마저 잃었다.

생계를 위해 새 직장을 찾았지만 이미 '노조주동자'가 된 그를 선뜻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어쩌다 취업이 돼도 정보기관원들이 회사로 달려가 블랙리스트를 보여주며 해고를 종용했지요. 3개월도 못돼 결국 쫓겨나기 일쑤였어요."

남편을 만난 곳도 구로였다. 남편 역시 노조활동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85년 결혼을 하고 부천에 신혼살림을 꾸렸지만, 여전히 취업은 힘들었다. 설상가상으로 86년 '근로기준법과 노동 3권 보장'을 외치며 분신한 구로공단 노동자 박영진씨의 시신을 지키며 농성을 벌이다 구속되기도 했다.

두 아들의 엄마가 된 조씨는 봉제공장에서 일감을 가져와 집에서 일했다. 공장은 떠났고 이미 주부가 됐지만, 그는 여전히 여공이었다.

그는 지금도 구로 근처(신도림)에 살며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젠 여공도, 노동운동가도 아니지만 그 치열했던 기억을 잊은 적이 없다.

첨단 IT밸리로 변신한 구로공단을 볼 때마다 그는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청년들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힘겨워하고 서민들의 삶이 여전히 팍팍한 것을 보면, 과연 그 시절보다 세상이 정말로 좋아지기는 한 건지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정말로 우리 자식들은 우리보다는 나은 삶?살았으면 좋겠어요."

박상준기자 buttonp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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