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일과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른 시간은 아니다. 해는 중천을 지나고 있을 것이며, 부지런한 이들은 벌써 점심 끼니를 기웃거릴 때다. 하지만 연극인들에게 이 시간은 공연은 물론 연습을 위한 연출의 '콜'이 떨어져도 쉽게 움직이기 어려운, 그냥 이른 아침일 뿐이었다. 평일의 경우 주로 퇴근길 직장인 관람객의 시간표에 맞추다 보니 관행처럼 자리 잡은 공연계의 적정 공연 시작 시간은 오후 8시. 요즘 들어 3시간 가까운 뮤지컬이 늘어나면서 덩달아 길어진 연극공연 시간 탓에 배우들은 무대에서 내려와 '소주 한 잔'할 여유조차 없이 귀갓길을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공연계의 이 같은 시간표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
11일 오전 11시. 서울 명동예술극장 로비는 연극 '벽속의 요정'을 보기 위해 모여든 관객들로 북적거렸다. 한 발치만 걸어나가면 서울 시내에서 가장 붐비는 명동거리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오전 11시를 가리키는 시곗바늘과 관람티켓을 손에 쥔 채 극장 문으로 사라지는 인파(전체 380석 중 355명 입장)는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어울림이다. 무대에 오른 김성녀는 "배우 생활하면서 이렇게 이른 시간 무대에 오르기는 처음"이라며 "아마도 명동예술극장에서도 이런 아침 공연은 유례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극장 관계자는 "다양해지는 관객층의 관람 스케줄에 맞게 극장의 공연시간도 분산되고 있다"며 "가끔 평일 낮 공연으로 3시 무대가 있지만 실제 육아를 하는 입장에선 오전 공연이 아니면 보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아 기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배우 김성녀의 모노 드라마인 '벽속의 요정'은 한 여성의 수난사를 지난한 한국 현대사와 버무려 보여주는 작품으로 아무래도 주부 관람객이 많다. 이날 아침 공연에는 주부는 물론 추위로 밤 나들이가 불편한 노년층도 많았다. 극장에 따르면 이날 50, 60대 관객 비율이 평소 밤 공연보다 30% 가량 높았으며 20, 30대 예매자 대부분이 60대 노년층 관객을 동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주로 아동극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아침 공연, 대중음악 무대에서 가끔 시도하는 심야 공연, 연극인들의 휴식과 재정비를 위해 휴일로 여겨지던 월요일 공연 등이 확대되면서 무대공연 시간 제한이 점차 무너지고 있다. 관객들은 원하는 시간대의 공연을 즐길 수 있어 좋고, 극장과 제작사는 수익 다변화를 꾀할 수 있어 나쁘지 않다.
한국공연예술센터는 지난해 신춘문예 당선 작가들의 신작을 무대화한 연극 '미사여구 없이'를 최근 서울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재공연하면서 특별 심야공연(오후 10시 시작)을 2회 편성해 인기를 모았다. 이 연극은 우연히 하룻밤을 함께 보내게 된 두 남녀의 설전을 그린 작품으로 주 관람객 연령층인 20대 연인들에 어필하는 관람시간을 배정했다는 게 극장측 설명이다.
클래식 음악계는 2004년 서울 예술의전당의 '11시 콘서트'로 시작된 오전 11시 음악회가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며 마티네, 즉 낮 공연이 완전히 정착됐다. 수도권 대부분의 공연장이 클래식 입문 프로그램으로서 11시 콘서트를 하고 있다. 1만~2만원대의 비교적 저렴한 가격과 스타 진행자의 해설이 가미된 게 공통된 특징이다. 극장 가동률을 높이고 잠재 관객을 발굴할 목적으로 시작된 11시 콘서트는 최근에는 가벼운 소품 위주 진행에서 벗어나 레퍼토리를 다양화하고 오페라까지 무대에 올리는 등 관객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새로운 변화를 꾀하는 모양새다.
3월 20일부터 매월 셋째 주 목요일 오전 11시에 선보일 성남아트센터의 마티네 콘서트는 '음악, 그 베일을 벗기다'를 주제로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팝페라 가수 카이가 진행을 맡고 최근 국내 주요 악단을 두루 지휘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최수열이 지휘를 맡는다. KBS교향악단,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등 한국의 대표적인 오케스트라들이 무대에 선다.
2월 27일 오전 11시 첫 공연을 포함해 올해 6회에 걸쳐 진행되는 고양 아람누리의 마티네 콘서트는 첼리스트 양성원이 해설자이자 연주자로 무대에 오른다. '올 댓 스트링'을 테마로 실력파 연주자들이 바이올린, 첼로, 비올라, 하프, 클래식 기타 등 현악기의 모든 것을 선보인다.
세종문화회관은 18일 첫 공연을 시작으로 매월 둘째 주 화요일 오전 11시 체임버홀에서 '오페라 마티네'를 연다. 지난해 8월부터 과감하게 오페라를 오전 공연으로 선택한 세종문화회관은 올해는 파격적으로 대작 오페라인 베르디의 '아이다'를 첫 작품으로 선택했다. 화려한 무대, 웅장한 합창과 발레 대신 드라마 부분만을 쏙 빼서 하이라이트로 펼치는 공연이다.
강동아트센터의 '아톡'은 18세기 유럽 귀족 사회의 살롱음악회를 표방하는 마티네 콘서트다. 100석 규모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관객과 음악가가 친밀하게 만나는 형식이다. 지난달 더블베이시스트 성민제의 공연에 이어 20일 오전 11시에 무대에 오르는 쳬?두 번째 아티스트는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다. 모차르트 바이올린 소나타 K.301 등을 연주한다. 이창기 강동아트센터 관장은 "다양한 장르 아티스트들의 무대를 통해 앞으로도 잠재관객 개발과 문화향유 확대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