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러 언어들이 존재한다. 국어 영어 불어처럼 나라와 인종에 따라 언어가 다르기도 하지만, 직종과 분야에 따라서도 쓰는 말이 다르다. 경영이나 통신, 법률 등 전문 분야에서 사용되는 말은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이에 비하면 정치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가 사용되는 영역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중의 지지를 먹고 사는 분야인데, 보통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정치에서 오가는 언어는 도대체 이해하기 힘들다. 당사자들이 열심히 설명하는데 대다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희한한 상황이다. 이런 난독증(難讀症)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대표적 사건이 바로 서울중앙지법의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 무죄 판결이다. 이를 거론하는 것이 "법에 따라 양심껏 판단했다"는 재판부의 자세를 무시하거나, 김 전 청장의 유죄를 입증할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취지에 반박하고자 함이 아니다. '무죄추정'이라는 형사소송법의 원칙에 이의를 제기하고자 함도 아니다. 내부고발자인 권은희 전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의 진술이 다른 증인 17명의 증언과 달라 신뢰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판단 또한 논박하고 싶지 않다.

그저 우리 주변의 보통사람들이 제기하는 상식적인 의문을 옮겨보고자 한다. 김 전 청장이 무죄라면, 대선 직전 이루어진 경찰의 허위 수사결과 발표는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대선을 8일 앞둔 2012년 12월 11일 국정원 심리전단 소속 여직원의 선거 개입 활동이 문제됐다. 여직원에 대한 인권 침해냐,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이냐를 놓고 거친 공방이 오가는 상황에서 대선을 사흘 앞둔 12월 16일 밤 11시, 수서경찰서는 느닷없이 "국정원 여직원 노트북을 분석한 결과 대선후보에 대한 비방, 지지나 댓글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경찰은 몇 달 후인 2013년 4월 18일 "국정원 직원 김모씨, 이모씨에 대해 국정원법 위반(정치 관여) 혐의를 인정,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다"고 발표했다.

사람들은 경찰의 두 차례 수사결과 발표와 이후 이루어진 검찰 수사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알게 됐다. 하나는 국정원 등이 댓글 공작 등을 통해 대선에 개입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선 직전 이루어진 수사경찰서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는 허위라는 것이다. 김 전 청장의 혐의는 특정 후보(박근혜 후보)에 유리한 영향을 미치기 위해 허위 수사 결과를 발표토록 했다는 것인데, 법원은 이 대목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이 있었고, 허위 중간수사 결과 발표가 있었는데, 이에 책임질 사람은 없게 된 것이다. 법리적 판단이나 증거 유무와는 별도로, 실체적으로는 죄가 존재하는데 죄 지은 사람이 없는 황당한 상황이 생긴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낙마나 국정원 댓글 수사팀의 경질과 좌천도 그렇다. 채 전 총장은 혼외자 논란으로 낙마했고, 수사팀장은 자의적인 영장신청 등 항명을 이유로 좌천됐다는 식으로 개별적으로는 다 논리적 근거가 제시됐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의 눈에는 권력이 부담스러워 하는 국가기관 대선개입 의혹을 깊이 파헤친 총장과 검사들이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죄 지은 사람들은 멀쩡하고 그 죄를 드러내고 벌 주려는 사람들만 다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대선 기간 나라를 들썩거리게 했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불법유출 의혹도 그렇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해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을 했다"는 주장을 던지고, 그 근거로 어느 나라도 공개하지 않는 정상들의 대화록까지 유출해 공개했는데, 검찰은 고발장을 접수한지 218일이 되도록 결과를 내놓지 않고 있다. 그저 "찌라시를 보고 말했다"는 여권 실세의 오만한 변명만 들릴 뿐이다.

정치는 보편적 언어에 바탕을 둬야 한다. 보통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언어'가 난무하면, 건강한 정치나 건강한 사회는 요원해진다. "어, 이거 이상한데"라는 의문이 자꾸 생기고 이게 풀리지 않으면, 그 사회는 난독증을 넘어 불신의 중병에 빠져들게 된다.

이영성 논설위원 leey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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